• 한국 국민들에게는 보편적인 특성도 있지만, 다른 나라 국민들과는 다른 특징적인 현상도 보인다. 폭발적인 촛불시위 현상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 국민들의 감성·감정적 성향, 군중심리에 이끌리는 성향 등의 문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감성·감정적 성향, 군중심리에 이끌리는 성향 등은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도 보이는 인간 특성 중 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좀 더 두드러진 면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러한 성향은 우리나라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부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한국의 발전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부정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앞으로 긍정적 효과를 높이고 부정적 효과를 줄이는 방향으로 활용되어야 할 것이다.

    1. 감성·감정적 성향
    2008년 미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큰 사회문제로 확산된 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 국민의 감성·감정적 성향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감성·감정적 성향이 있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오월제와 시월제 등 제천행사에서 ‘사람들은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려를 거쳐 조선 초에도 각 고을마다 한데 어울려 각종 신(神)들에게 제사(祭祀)를 지내며 술을 마시고 노래와 춤을 즐기는 문화가 널리 퍼져있었다.

    이처럼 술을 즐기고 노래를 부르는 감성적 문화는 오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늘날에도 술과 노래는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이러한 감성·정서적 성향은 예술성이 풍부한 민족문화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오늘날 한류열풍의 근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은 흥분과 분노를 잘하여 인간관계와 외교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 국민의 감성·감정적 성향은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의 변동, 그리고 문화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키워드이다. 4·19혁명의 발단이 된 마산시위로부터 근래에 있었던 효순·미선 촛불시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운동, 미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등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시위로 확산된 발단은 대부분 국민들의 감성·감정적 요인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이승만의 독재체제를 무너뜨린 4·19혁명이 일어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1차 마산시위 때 죽은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서 떠오른 사건(1960.4.11)이었다.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죽은 그의 참혹한 시신 모습이 찍힌 신문 보도는 마산시민을 흥분하게 하여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다. 이 2차 마산시위는 부산으로, 서울로 확산되어 4·19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1987년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분수령이 된 해이다. 전 국민이 동참한 6·10항쟁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약속한 6·29선언을 얻어냈다. 이로써 권위주의시대에서 민주화시대로 변화되었다. 이 정치변동도 감성을 자극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국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수사를 하면서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고 허위사실을 발표하였다. 얼마 뒤 기자들의 집요한 추적으로 사건의 은폐 내용이 드러났다. 물고문으로 죽었던 것이다. 국민들은 ‘고문치사를 은폐한 경찰’ ‘고문을 받다가 희생된 불쌍한 종철이’ 등 감성코드로 박종철사건을 이해하고 흥분하였다. 박종철사건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87년 6월 들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던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최루탄을 맞아 의식을 잃은 이한열의 모습이 다음날인 6월 10일 언론에 대서특필 되자, 국민들의 감정이 폭발하였다. 이것이 6·10항쟁의 시발점이었다. ‘불쌍한 한열이! 최루탄을 포물선으로 발사하지 않고 정조준 발사했느냐’며 경찰에 분노하였다. 그 날 이후 20여일간 전 국민들은 도시마다, 골목마다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반정부투쟁 대열에 동참하였다. 학생들은 물론 넥타이부대 직장인들도, 시장에서 꽁치 팔던 아줌마부대들도 시위에 동참하였다. 직선제를 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 배경이 되었지만, 이를 폭발시킨 것은 불쌍한 이한열의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최근 10여년간의 역사흐름 속에서도 국민들의 감성·감정적 요인들이 정치·사회 변곡점 마다 큰 역할을 하였다.

    2002년 12월 대통령선거는 노무현 후보가 감성론을 무기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제압한 선거였다. 한나라당에서 노무현 후보의 장인이 6·25전쟁 때 인민군의 앞잡이 노릇하여 양민들을 학살하게 하였다며 사상문제를 거론하고 나서자, 노무현 후보는 “제 장인은 좌익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키우고, 지금까지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라며 감성론으로 되받아침으로써 한나라당에 의해 색깔론으로 핍박당하고 있다는 동정론을 유발시켰다. ‘기타치는 대통령’ ‘눈물흘리는 대통령’ 등의 감성적 홍보가 설득력을 얻었던 선거였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건 때도 국민들의 감성론은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우리 국민들은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도 이를 뉘우치거나 울면 용서해주고, 울게 만든 사람을 탓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과오가 있더라도 약자로 보이면 불쌍한 감정을 갖고 용서하는 경향이 있다. 잘했더라도 강자라고 인식되면 동정을 받기 어렵고, 약자를 괴롭혔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는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을 받음으로써 불쌍한 존재로 비쳐졌고, 탄핵한 세력은 약자를 괴롭히는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2007년 태안반도 기름 유출사고가 났을 때, 우리 국민들은 세계 여론이 놀랄 정도로 태안으로 몰려가 환경 파수꾼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세계 역사 속에서 기름유출로 인한 환경오염사고가 태안처럼 빠른 시간에 정리된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방송을 통해 태안반도의 처절한 모습과 태안 주민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장갑 끼고 태안으로 간 것이 이른바 ‘태안기적’을 만든 것이다. 

    2008년 8월 27일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최고로 많은 불교신자들이 참여한 행사(20여만명)가 서울에서 열렸다. 그것도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이전부터 친기독교적 조치에 불만을 가졌던 탓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조계사를 지키던 경찰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2008년 7월 29일 서울 조계사에서 농성중인 『광우병국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근무하던 경찰이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탑승한 차량을 검문할 때, 의전을 무시하고 “총무원장이 타고 있는 차면 더 철저히 검문해야 한다”며 탑승자 신분증 검사에 이어 차량 내부와 트렁크까지 열어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조계사 관계자의 말을 통해 방송에 보도되자, 전국의 불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전국에서 올라온 불자들은 한결같이 ‘경찰의 그 한마디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올라왔다’고 언급했다. 앞서 지적한 우리 국민들의 감성·감정적 정서를 그대로 반영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국민들의 정서·감성·감정적 요인들은 우리의 정치·사회적 사건의 촉매제가 되어 왔다. 국민들의 감성적 성향은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이성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불만을 증폭시키는 역할도 한다. 

    따라서 어릴 적부터 감성과 이성이 조화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또한 정부에서도 국민들의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조기에 필요한 조치를 하거나 설득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빨리 빨리’의 한국인의 정서, 감정이 폭발하는 특징 등을 인식하지 못하고 늑장 대처하는 것은 위험하다. 때로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전략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