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장이 여성의 전유물이던 시대는 벌써 지나갔다.
    화장하는 남자가 점점 많아진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라는 책이 나온 지도 오래 됐다.
    ‘한국의 지성’으로 손꼽힐 정도의 저명한 사회생물학자가 쓴 책이다.
    동물은 수컷이 오히려 화려한 외모로 암컷을 유혹한다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공작을 보면 수컷의 꽁지는 길고 오색찬란하지만, 암컷은 꼬리가 짧고 무늬도 없다. 닭도 수탉이 볏이 크고 꼬리도 길다. 사슴도 뿔은 수컷에게만 있다. 사자의 갈기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어떠한가.
    지금은 여자가 화려한 치장으로 남자를 유혹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보면 벌거벗은 남성이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미의 상징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인 것이다.
    신라시대의 귀족자제들이었던 ‘화랑’(花郞)은 요즘 말로 하면 ‘꽃미남’이다. 지금 남자의 화장이 되살아나는 것은 이른바 여성시대를 맞아 미(美)를 추구하는 남성의 본성이 회복되는 게 아닐까.

    나도 언젠가부터 ‘화장하는 남자’의 대열에 들어섰다.
    아직은 눈썹 화장 정도에 머물지만 앞으로 화장의 범위는 차츰 더 넓어질 것 같다.
    눈썹 화장을 하는 이유는 내 눈썹이 약간 끊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오른쪽 눈썹이 심하다. 증명사진을 들여다보면 오른쪽 눈썹이 끊어진 게 보인다. 어느 관상쟁이는 눈썹 모양을 자그마치 열일곱 가지로 분류하고 그에 따른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논했는데 내 눈썹은 ‘끊긴 눈썹’에 해당한다. 그에 따르면 나의 눈썹 운(運)은 나쁘기만 하다.

    눈썹 운은 어떻든지 상관없지만 갈라진 눈썹은 미관상 좋지 않다.
    내가 눈썹 화장을 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전부터이다. 어느 날 눈썹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잔털이 상하좌우에 제멋대로 퍼져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집게로 잔털을 뽑아주니 그것만으로도 눈 주위가 깔끔해졌다. 잔털은 금방 자라기 때문에 수시로 뽑아주어야 한다. 그게 귀찮을 때도 있지만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따르기 때문에 꾹 참고 잔털 뽑기 작업을 완수한다.

    눈썹 화장이 그다지 복잡한 작업은 아니지만 그걸 하는 데도 꽤나 시간이 들어가고 신경도 쓰인다.
    눈썹 손질은 퍽 까다롭다. 눈썹 중에 지나치게 자라 제멋대로 뻗은 놈은 눈썹가위로 끝을 잘라주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만은 않다. 십년 전쯤 미용실에서 머리를 잘랐을 때 미용사가 내 눈썹을 가위로 쓱쓱 다듬어 주었는데 금세 눈썹이 가지런해져 기분이 좋았다. 그 생각이 나서 나도 따라해 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어떤 때는 가위를 댈수록 점점 내 기대와는 멀어지기도 한다. 한 번은 왼쪽 눈썹꼬리를 너무 잘라 버렸다.

    눈썹연필도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눈썹은 조금만 손을 대도 확 티가 난다. 갈라진 눈썹 은 잇고, 치켜 올라간 눈썹꼬리는 살짝 그려서 내려주어야 하는데 거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눈썹 사이를 이을 때는 점을 찍듯이 톡톡 찍어주어야 한다. 눈썹꼬리도 너무 내려오도록 그려놓으면 “여자처럼 그게 뭐냐”고 아내가 한 마디 한다. 눈썹연필 깎는 법을 몰라 심이 부러진 것도 여러 번이다.
    눈썹연필의 색상도 가지가지다. 나는 검은 색을 쓰되 잘 번지지 않는 딱딱한 연필을 쓴다. 머리를 갈색으로 염색한 어떤 남자 탤런트는 눈썹도 갈색으로 염색했다. 텔레비전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신라시대의 화랑들은 수십 명이 나란히 앉아 분 바르고 연지 찍고 눈썹을 그리는데 눈썹이 붉은 색이다.

    어떤 인터넷 블로그에서는 젊은 여성이 자신의 남자친구 눈썹 다듬어 주는 것을 순서마다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해 놓았다. 멋과 아름다움에는 고통도 따른다. 영화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를 보면 주연배우 멜 깁슨이 여자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부숭부숭 털이 난 다리에 왁스 천을 붙였다 떼면서 아픔을 견디지 못해 괴성을 지른다.

    인터넷을 좀 더 검색해 보니 날마다 화장하는 남성 직장인의 이야기가 나왔다.
    20십 대로 보이는 이 젊은이는 매일 출근 전에 30분씩 화장하는데 그 첫 순서가 눈썹 다듬기다. 눈썹 끝의 잔털은 수시로 제거하며, 눈썹을 살짝 그린다고 했다. 그가 ‘첫 화장경험’이라며 소개한 화장법은 이러하다.
    눈썹을 다듬고 면도한 다음에는 한 주에 두세 번 정도 피부의 묵은 각질을 제거하고 모공이 보이지 않도록 관리한다. 스킨로션(skin lotion)에 이어 로션(에센스, essence)을 바르는데 타원형으로 눈 아래부터 전체적으로 발라준다. 아이크림(eye cream)을 약손가락으로 눈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바른다. 메이크업 베이스(makeup base)는 투명한 것으로 사용하고, 유분이 적은 파운데이션(foundation)을 바른다. 잡티가 있으면 컨실러(concealer)를 쓴다. 남성용 파우더를 바른다. 워터미스트(water mist)로 화장이 지워지지 않게 하는 데 삼 분 내지 오 분이 걸린다. 액상립스틱으로 마무리한다.

    열 단계가 넘는 화장법이지만 남성용이어서 화장 티는 전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깨끗한 용모, 즉 깔끔함이다. 출근 무렵의 30분은 금쪽같은 시간이지만 아깝지가 않은 모양이다. 하루속히 화장이 습관이 되길 바란다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외모 중시 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 남성들의 심리를 엿볼 수 있었다.

    눈썹 다듬기가 ‘위험’하긴 하지만 계속해 보려고 한다.
    눈썹 휘날리는 것을 야성미로 여기던 시대는 지났다. 눈썹은 지붕처럼 이물질이 눈으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아주지만, 사람의 인상도 결정한다. 눈썹 정리만 해도 말끔하고, 눈썹을 살짝만 그려주어도 얼굴이 살아난다. 눈썹 정리는 그 위험(risk)을 감수할 만큼 이익(benefit)이 있는 것이다.

    내가 이년 전부터 머리를 기르고 파마를 한 것도 넓게 보면 남성 화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내의 눈총에 아랑곳하지 않고 향수 뿌리기를 고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얼굴 마사지는 별로 해 본 적이 없지만,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들이 엄마와 함께 오이 같은 것으로 얼굴 마사지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앞으로는 가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화장 자체에 거부감이 강하다.
    여자도 지나치게 화장하면 거북스럽다는 반응을 초래한다. 생머리에 화장은 한 듯 안 한 듯 한 정도의 여성이 이상적이라고 고집하는 남자도 많다. 먹고 살 만해지면서 화장에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도 사실이다.

    미(美)를 추구하는 것 자체는 인간의 본성이다.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워지는 것은 창조주의 뜻과도 배치되지 않는다.
    화장을 할 때 나는 왠지 좀 겸손해진다. ‘아무러면 어때?’라는 교만이 아니라 ‘깔끔해지도록 해야지’라는 마음으로 바뀐다. 화장은 옷차림과 마찬가지로 삶의 한 양식이며, 자기계발의 한 과정이다.
    이제 남성 화장, 남성 패션에 박수를 보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