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우리는 칼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다

    20세기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사회를 통틀어 인류의 사상을 지배해온 공통된 이념은 바로 평등의 이념이며 이 이념이 20세기 후반의 세계 경제정책을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 이념의 배후에는 바로 칼 마르크스의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동안의 정부의 경제운영 철학은 실업의 발생과 가난한 취약계층의 출현을 시장실패로 간주하는 마르크스적 세계관을 기초로 해서 형성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정부가 실업을 해소하고 취약계층을 구제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민주정치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 좌승희 박사 ⓒ 뉴데일리
    ▲ 좌승희 박사 ⓒ 뉴데일리

    칼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과 자본가의 노동자착취이론은 자본주의사회의 작동원리를 보는 하나의 세계관이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란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계급투쟁의 장이며, 이는 전자가 후자를 착취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를 불평등이 지배하는 하나의 모순된 체제로 본 것이다.5) 이러한 세계관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대응전략을 낳았다. 우선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작동원리가 불합리하다고 보고 이를 타파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불평등을 해소하기위해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한편 이와는 다르게 자본주의 체제가 마르크스가 지적한 어두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타파하기보다는 마르크스가 지적한 불평등의 문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20세기 자본주의 경제의 변화는 바로 수정자본주의 혹은 혼합경제, 더 나아가서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경제체제의 진화, 정착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득과 자원의 재분배장치를 통해 “착취”의 결과를 완화하여 민주사회의 평등의 이념을 실현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적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느 입장이든 대응 방법상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마르크스가 지적한 계급투쟁의 결과로 나타나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선발자의 후발자에 대한 착취라는 자본주의경제의 모순관을 모두 다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20세기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인류의 공통된 세계관은 마르크스의 세계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관은 옳은 것인가? 그래서 자본주의는 이미 마르크스 본인이 분석한대로 종국적으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우선은 인류가 250만년도 더 되는 세월 동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분업과 전문화원리에 기초한 교환경제시대, 즉 수렵과 채집의 시대를 멸망하지 않고 생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번영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마르크스적 자본주의관이 잘못되었음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흥미롭게도 최근의 새로운 과학관에 의하면 만일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호혜적 만남이 없는 계급투쟁과 착취가 자본주의의 진정한 모습이라면 이 체제는 결코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모순된 체제로서, 존속할 수 없는 자본주의라는 허상을 그려놓고 이를 대체하기 위한 공산주의라는 또 다른 허상을 그리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이 우리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고 보는 복잡계(complexity) 과학관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부분이 합쳐져 부분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복잡한 세상은 부분만을 보면 전체를 알 수 있다는 기존의 환원주의(reductionism)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 만물은 서로 다른 개체끼리 만나 힘을 보태어 훨씬 더 큰 힘, 즉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 부분과는 다른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 나간다. 서로 다른 무기물이 만나 유기물이 되고 서로 다른 유기물이 만나 세포가 되고 서로 다른 세포들이 만나 생명을 창출하는 생명현상의 오묘함도 결국은 서로간의 만남과 시너지의 창출을 통해 이루어진 셈이다. 더 좋은 짝을 만나기 위한 경쟁은 있지만 결과적으로 더 좋은 이웃을 만나지 않고 더 높은 질서인 생명을 창출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사회나 시장경제의 작동원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경제사회발전이란 더 좋은 짝을 만나 더 큰 힘을 창출함으로써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질서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마차를 타던 경제가 자전거를, 자동차를, 기차를, 비행기를, 우주선을 타는 사회로 발돋움해 나가는 과정이야 말로 개인들이 힘을 합쳐 강한 조직을 만들어내고 보다 훌륭한 개인들과 조직들이 힘을 합쳐 시너지를 창출함으로써만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경제는 계급투쟁이나 착취가 아니라 협력을 통한 시너지창출과정을 통해 변화, 발전해 나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길은 나보다 훌륭한 이웃을 두어야 한다는 명제가 도출된다.
    그래서 이 세상의 변화는 선발자가 후발자를 착취해서가 아니라 후발자가 선발자를 무임승차하여 베낌으로써 동반성장하게 된다. 즉 우리 모두는 일상에서 남의 노하우를 모방하고 베낌으로써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이나 국가 간에 있어서도 후발자가 선발자의 경영이나 발전의 노하우를 무임승차함으로써 도약을 만들어 간다. 앞선 선각자, 그것이 선진국·중진국이든, 일류기업이든, 자본가이든, 혁신가이든, 부모든, 선생이든, 선배든, 더 나은 동료든, 더 나은 후배이든, 이들을 청산함으로써가 아니라 이들을 역할 모델로서 이웃으로 두고 “착취”함으로써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6)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관은 복잡한 세상의 이치를 뒤집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더 좋은 이웃이 없이 모두가 같고 평등한 사회는 시너지를 창출할 수가 없어 영원한 휴식을 벗어날 수가 없다. 같은 세포끼리의 만남은 세포덩어리를 만들어낼 뿐이지 생명을 창출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복잡계의 원리이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말로는 이미 정해진 길이었다.
    이 세상은 어두운 면도 있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서로 배우고 도움으로써 살길을 찾는 그래서 무엇이든 만들어 낼 수 있는 변화무쌍한 복잡한 세상이다. 훌륭한 이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는 흥하고 역으로 흥하는 이웃을 청산하려는 사회는 필히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새로운 과학관의 시사점이다. 이제 인류는 마르크스의 세계관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더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칼 마르크스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2) 케인지안 세계관도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케인지안 세계관이 또 다시 최근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케인지안 세계관은 바로 수정자본주의, 혹은 혼합경제라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체제의 혼합을 시도하는 좋은 이념이긴 하지만 틀린 마르크스적 세계관을 그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합성에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정부의 개입을 통해 마르크스적 착취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이라는 모순을 완화하겠다는 좋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회주의가 가져오는 현실과의 괴리 문제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지키면서 평등을 실현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작금의 주택금융위기마저도 의식(衣食)문제를 해결한 중진국 이상 혹은 선진국에서 대두되는 주(住)문제를 해결하려는 과도한 민주주의 평등이념이 초래했음을 상기한다면 케인지안 세계관은 사실상 항상 국가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흐를 가능성을 안게 되는 것이다. 작금의 세계경제위기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도 이러한 경향을 충분히 읽을 수 있으며 멀지 않아 이에 대한 비용을 크게 치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국민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의 한계를 분명히 설정하지 못하는 한 케인지안 세계관은 평등주의에 경도된 포퓰리즘, 나아가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시장경제라는 현실과의 끝없는 충돌을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가 관건이며, 이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위기는 재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케인지안 세계관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