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대 안보뉴스⑥~⑩]'불량무기'부터 '연평도 기습도발'까지'불량무기'로 군 전력증강계획 전면수정…연평도 기습도발로 천안함 논란까지 '조용'
  • 2010년은 ‘다사다난(多事多難)’이라는 말이 무색한 해였다. 천안함 사태가 북한제 어뢰의 발견으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하반기가 되자 우리 군이 그동안 '세계적인 명품무기'라고 자랑했던 무기들의 불량이 연이어 드러나더니 북한의 연평도 기습도발로 막을 내렸다.

     

    ⑥ 7월~11월 명품무기가 불량무기로

    천안함 사태 논란이 수그러들 즈음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 급하게 개발․양산된, 일명 ‘명품무기’들의 결함이 속속 드러났다. 그 시작은 7월 29일 전남 장성 육군기계화학교에서 훈련 중이던 신형 보병전투차 K-21의 침몰사고다. 당시 K-21은 도하 훈련을 하다 원인불명으로 침몰, 부사관 1명이 숨졌다. 군은 진상조사를 약속했고, 언론 또한 K-21 보병전투차의 결함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 하지만 신형 장비 결함은 K-21에서 그치지 않았다. K-9 자주포 엔진의 ‘캐비테이션 현상(엔진 실린더에 구멍이 생기는 현상)’, K-1 전차 포신 파열, K-11 복합소총의 불량, 윤영하급 신형 고속함 결함, 신형 전투화 밑창 불량 등이 속속 드러났다. 생산가격이 80억 원 가까이 되는 차기 전차 K-2 흑표에서도 많은 결함이 나타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렇게 군이 ‘명품무기’라고 선전하던 신형장비들이 대부분 ‘불량무기’로 판명되자 국민들은 물론 언론마저 크게 분노했다. 천안함 사태 이후 국방부의 노고를 보며 발표를 믿고 보도해줬더니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하며 ‘뒤통수’를 친 격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국방부는 신형 장비들의 문제점을 모두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책임자 문책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아 국방부의 약속을 믿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⑦ 11월 23일 北의 연평도 포격도발

    ‘불량 무기’ 논란이 잠잠해지던 11월 23일 오후 2시 32분. 북한이 연평도를 기습 공격했다. 북한군은 당시 연평도 서남쪽 해상을 향해 통상적인 사격훈련을 하던 해병 연평부대를 향해 76mm 해안포와 122mm 방사포 170여 발을 발사했다.

  • 북한군의 포격은 민가와 군부대를 가리지 않아 해병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수십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부상을 입었다. 전사자 중 故서정우 하사는 ‘말년휴가’를 떠나기 위해 선착장으로 들어서다 적의 기습이 시작되자 후임병들을 이끌고 급히 부대로 복귀하던 중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故문광욱 일병은 자대 배치된 지 불과 40여 일 만에 전사했다.

    한편 해병 연평부대는 K-9 자주포 6문 중 절반이 고장 난 와중에도 불과 13분 만에 적 화력원점을 향해 80여 발의 대응사격을 했다. 이 같은 연평부대의 대응사격에 일부 국회의원들이 ‘전쟁 나면 4~5분 만에 적을 타격한다더니 왜 13분씩이나 걸렸냐“며 군을 비난하다 오히려 국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북한의 연평도 기습도발 이후 그동안 국민들이 잊고 있었던 북한의 위협과 중국의 대한반도 전략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한국군의 전작권, 교전규칙, 서북도서와 북한의 비대칭 전력에 대응할 수단에 대해서도 국민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일부 매체들은 ‘北의 포탄은 연평도를 쏜 게 아니라 김정일 일가를 쏘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⑧ 11월 23일 이후  대북 심리전 재개

    북한의 연평도 기습도발이 있던 날, 우리 군은 북한을 향해 대북전단 등이 실린 풍선을 날려 보냈다. 대북방송 또한 바로 개시했다.

    천안함 사태 이후 ‘대북심리전을 곧 재개할 것’이라고 했다 몇 달 동안이나 움직이지 않던 국방부가 연평도 기습도발에 즉각 행동을 보인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국방부는 북한을 향해 활발히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다. 지난 12월 21일에는 김포 애기봉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식이 열렸다. 6.25 전쟁 이후 연말마다 불을 밝혔던 애기봉 트리는 盧정권 시절 북한의 ‘상호비방 금지’ 주장에 동의하면서 맥이 끊어졌다 7년 만에 불을 밝혔다.

    한편 정부는 2011년부터 통일부와 안보관계부처를 중심으로 민간대북방송과 민간대북전단 조직을 지원하는 정책도 준비하고 있다.

    ⑨ 11월~12월  본심 드러낸 중국과 한․미․일 삼각동맹 대두

    천안함 사태 당시에는 그 원인을 놓고 논란이 있었기에 중국의 태도는 논란거리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이 북한 소행이 분명한 연평도 도발도 ‘이번 일은 남한이 북한을 도발했기 때문’이라며 북한 편을 들자 중국을 다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이런 태도에 가장 강경한 모습을 보인 건 미국 정부. 일본 정부는 연평도 기습도발 직후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해 ‘우리는 미국과 뜻을 함께 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혀왔기에 미국의 의지가 중요했다. 오바마 美대통령은 ‘동맹국과의 약속을 지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겠다’며 항모전단 급파를 지시했다.

    중국은 이런 미국의 대응에 처음에는 격렬히 반발하는 듯 하다 나중에는 ‘좋게 해결하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서해에서의 한미연합훈련에 대해서는 제대로 논평조차 내놓지 못했다. 여기다 미국이 한반도 안보위기 상황에서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자 중국 당국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2011년 초에는 3개 항모전단이 서태평양에 집결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중국은 최신형 대함미사일을 서해지역에 배치하는 등 부산을 떨고 있다.

    한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국민들은 중국과 북한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특히 그동안 ‘중국이 우리나라의 미래시장’이라는 주장을 해온 사람들은 크게 줄어들고 ‘중국이나 북한이나 똑같다’는 비판론이 비등해졌다.

    ⑩ 12월 29일까지  종북좌파 단체들의 변화

    2010년 종북좌파 진영은 서울 G20정상회의 방해를 시작으로 2012년까지 좌파 대통합을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했지만, 천안함 사태부터 연평도 포격에 이르는 북한의 도발로 입지가 사라졌다.

    천안함 사태 때는 밤 늦은 시간 바닷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나마 정부 자작극이나 피로파괴설, 좌초설 등의 음모론이라도 주장할 수 있었지만 북한의 연평도 기습도발은 벌건 대낮에 민간인까지 공격한 것이라 좌파들의 음모론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는 게 중론(衆論)이다.  

    대학생과 직장인들은 연평도 기습도발 이후 ‘어디 가서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거나 연평도 기습도발이 우리 쪽 때문이라는 식의 주장했다가는 왕따 당한다’며 일련의 도발로 변한 젊은 세대 사이의 안보의식과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종북 진영은 이 같은 사회분위기 변화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기존 단체는 ‘껍데기’만 놔두고 최근 청와대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나눔’과 ‘기부’, ‘다문화’ 등의 이름을 내세워 ‘새 단체’로 변신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다만 그들의 속내는 그대로다.

    지난 29일 서울 YMCA에서 창립식을 가진 '진보대통합 연대회의'는 2012년 총선과 대선승리를 목표로 하는 단체다. 좌파 유명 인사들 다수가 모였지만 종북적 주장을 강조하지도, 대외적으로도 많이 홍보하지도 않았다.이렇게 좌파 진영의 목소리가 작아진 것을 힘이 빠졌다기 보다는 80년대와 같이 '수면 아래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⑪ 그 외

    이 외에도 서울 G20 정상회의 방해를 위해 외국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를 초청하려 했던 일, 서울 G20 정상회의를 노리고 침투한 것으로 추정되는, IMU 같은 테러조직의 국내 잠입, ‘짝퉁 부품’으로 정비하다 추락한 링스 헬기, 노후화로 연이어 추락한 공군기 등도 평소와 같으면 주요 국가안보 이슈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전례가 없을 만큼 큰 일이 많았다.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도 31일 2010년 마지막 브리핑에서 “올해는 3월 26일 천안함 사태를 시작으로 정말 바빴고 힘든 한 해로 기억된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우리 국민들이 그동안 잊고 살았던 국가안보의 중요성과 북한의 위협, 중국의 야욕을 올해 사건을 통해 다시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