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신앙의 태도로 신을 경배하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는 종교에 따라 다르고,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종교가 자리 잡고 있는 문화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격이 떨어질수록 종교를 믿는 방법과 자세가 유별나고 유난스럽습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그 신앙이 광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삶의 방법도 배타적이고 독선적입니다. 극단적인 신앙의 삶 속에는 인간의 영혼을 깨우는 맑고 싱싱한 믿음이 발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 집단에서는 언제나 독선과 아집이 지배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정의, 자기 진리에 도취되어 다른 종교를 비하하고 멸시하는 오만이 있습니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이슬람 채권 '스쿠크(Sukuk)'와 대통령 조찬 기도회 논란은 배타적이고 오만해져 가는 종교인들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이슬람 채권권법을 반대하면서 조용기 목사는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신임회장 취임 예배에서 "정부가 이슬람 채권법을 추진할 경우 이명박 대통령 하야 운동을 벌이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모한 발언입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법안을 추진한다고 해서 하야 운동을 하겠다는 발상과 발언은 목사의 교만과 무지가 절정에 달한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나라의 정책에 반대하는 정도를 넘어서 대통령 하야 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정치와 종교의 기본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인이라는 표를 가진 목사의 무분별한 세도이자 정치를 향해 협박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협박은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인 길자연 목사로 부터도 나왔습니다. 길자연 목사는 한나라당 지도부를 방문하고 이슬람 채권법을 통과시킬 경우, 여기에 협조한 국회의원에 대해 낙선 운동을 벌이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이렇게 위협적인 자세로 정치권의 무릎을 꿇게 했던 길자연 목사는 다시 이명박 대통령을 공개 석상에서 무릎 꿇게 만들었습니다. 길자연 목사는 수천 명이 모인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우리 다 같이 자리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심정으로 1분 동안 통성 기도를 하자"고 말했고, 결국 이명박 대통령도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목사의 말에 "참석자들이 하나 둘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고, 단상에 있던 이대통령과 김 여사 등 몇몇 만 의자에 그대로 앉아 있는 상황이 됐다. 그러자 김 여사도 무릎을 꿇으면서 이 대통령의 허벅지 부근을 찔렀고, 잠시 주저하는 듯 하던 이 대통령도 함께 무릎을 꿇었다"고 보도됐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쓴 웃음이 나오면서 허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국의 신앙이 어찌 이 정도 밖에 안 되고, 대통령이 어찌 이렇게 줏대가 없단 말인가. 하필이면 부인이 대통령의 허벅지를 이런 장소에서 찌른단 말인가..." 결국 장로 대통령은 목사의 강요와 부인의 채근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물론 종교 예식이 무릎을 꿇는 것이라면 무릎을 꿇는 것이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와 대통령을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의식에도 없고, 순서에도 없고, 격식에도 맞지 않는 통성 기도, 그것도 무릎을 꿇는 통성 기도를 하게 한 길자연 목사의 판단과 태도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통성 기도 자체가 유별나고 유난스런 모습입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이 함께 모인 곳에서 억지로 소리를 질러 통성 기도를 한다고 해서 더 기뻐하고, 죄진 것을 더 사해 줄 리가 없습니다.

    간절한 기도는 남을 의식하지 않는 혼자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 절실한 기도는 골방의 기도입니다. 허지만 골방에서 혼자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국가적 위기와 국민적 절박감에 처했을 때 함께 신을 향해 눈물로 부르짖는 통성 기도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통성 기도가 교회에서, 같은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끼리 한다면 교인과 목사의 자유이지만, 기독교 신자만이 아니고 다른 종교 신자도 있을 것이고, 명색이 국가를 위한 조찬 기도회에서 통성 기도를 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과 무지의 표본입니다.

    길자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회장은 하느님을 향한 죄를 고백하는 통성 기도를 하자고 했는데 대통령이 국민들 앞, 텔레비전 앞에서 무슨 죄를 어떻게 고백한단 말입니까. 결국 이 조찬 기도회는 정치 쇼, 종교 쇼가 된 것입니다.

    길자연 목사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한국 기독교인들 얼굴을 부끄럽게 하는 타락 선거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임기가 1년인 총회장을 서로 하기 위해 목사들이 돈을 뿌리고 부패 선거를 한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길자연 목사 바로 전에 회장을 지냈던 이광선 목사는 양심 선언을 통해 돈을 쓰고 당선되었다고 고백하고, 이것이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오랜 타락 선거의 관행이라고 밝혔습니다. 대통령을 무릎 꿇게 한 길자연 목사도 돈을 쓰고 회장에 당선됐다는 폭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돈을 쓰고 부패 선거를 해서 신앙과는 관계없는 연합회 회장을 하겠다는 것은 목사의 허세, 공명심이고, 정치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목사들일 수록 정치 발언이 강하고 종교적 쇼가 유난스럽습니다. 통성 기도로 죄를 고백할 것이 있으면 목사 자신이나 할 일이지 거기에 왜, 나라의 대통령까지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까.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대통령이 무릎을 꿇은 것은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이 기독교 방식으로 자신의 종교적 양심과 신앙을 표출하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하고, 한국교회언론회는 "대통령의 기도는 애국의 한 표현"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이것은 궁색한 변명이고 속보이는 강변입니다.

    이대통령이 처음에는 무릎을 꿇지 않고 앉아 있었던 것은 애국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방법이 적절치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독교인들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불교, 이슬람교, 무신자를 포함하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입니다. 종교와 정치의 유착은 낡은 시대의 퇴물입니다. 한국의 유난스럽고 극성스런 신앙 풍토가 대통령의 권위를 실추시켰습니다.

    길자연 목사가 대통령의 무릎을 꿇게 한 것이 조용기 목사의 대통령 하야 협박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다는데서 그 파장과 의미가 더욱 큽니다.
    조용기 목사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채권이 들어오면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은 경제 논리의 초보도 모르는 무지한 막말입니다. 자본의 생리는 그 돈이 이슬람 돈이든 크리스천 돈이든 냉혹하고 냉혈적입니다. 기독교 국가에서 들어 온 자본이라고 해서 그 돈이 선하고 자애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 돈이 어디서 들어 왔든 꾼 돈을 못 갚으면 냉혹한 자본 논리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슬람채권 '스쿠크(Sukuk)'는 이자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 '샤리아(Shariah)'에  따라 만들어 진 것으로 이자 대신 배당금을 받는 것이며 미국의 채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적자 예산과 빚 문제로 온 나라가 격론을 벌이고 있는 미국에서 가장 돈을 많이 빌려 온 나라가 중국입니다. 중국은 장래 세계에 위협이 되고 무서운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경계하면서도 미국은 나라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중국 돈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 경제를 운영하는 고충입니다. 대부분 땀 흘려 일 해 본 경험이 부족한 목사들은 인간의 생존이 얼마나 힘든 일이고, 국가 경제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책무인지를 체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쿠크'를 도입하는 것은 돈을 빌려 오는 것입니다. 이슬람채권법 의 세금 혜택이 다른 국가 채권과 같은 수준의 혜택인지 여부와, 자본 도입에서 함정은 없는지를 점검하는 경제 논리로 문제를 풀어야지, 기독교적인 종교 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금융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는 '자카드(Zakat)'가 테러 자금이 될 수도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자카드'는 기독교의 십일조 헌금과 유사한 개념으로 석유 수출 등 다른 경제 행위에도 적용됩니다. 이슬람 채권의 '자카드'가 테러 자금 우려가 있다면 중동의 석유도 도입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헌금이 목사의 부정 선거 자금이나, 목사의 탈선 비용, 목사 자녀들의 사업 자금으로 유용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기독교의 십일조나 헌금을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서 청구권 자금을 도입해서 경제개발을 시도했을 때 반대자들은 매판자본이 들어와 한국이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가 된다고 반대를 했었습니다. '스쿠크'가 나라를 망치고 테러 자금이 될 수 있다는 발언이 얼마나 감정적이고 극단적인 발언인지를 목사들은 알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과 발언들이 중동 국가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한국의 국익을 저해 할 수 있습니다.

    9.11 테러로 이슬람에 대해 민감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는 미국에서도 속으로는 모슬렘을 경계하고 경원하는 국민들이 많지만 표면상으로는 그런 내색을 절대로 하질 않습니다. 이슬람과 테러 집단인 알케이다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일부 지각없는 목사들이나 기독교 신자들이 모슬렘을 적대시하고 심지어 사탄이라고 까지 말하는 것이 국가의 장래와 민족의 미래에 얼마나 무서운 해악이 될 수 있는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종교가 소중하면 다른 종교도 귀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지금까지 미국과의 관계로 인해 각별한 혜택을 받아 왔습니다. 이슬람채권법이 기독교에 대한 혜택이나 다른 국가의 채권보다 더 많은 것이라면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지만, 이슬람 자본 자체를 죄악시하고 테러 자금으로 경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무식한 발상입니다. 기름 해결과 석유 자금 유치를 위해 세계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고 있는 마당에 지각없는 일부 기독교인들로 인해 나라에 불이익을 초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종교의 가르침이 내면화되고 생활화 될 때, 종교 그 자체를 위해서나, 신앙인 자신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유익한 것이 되고, 그 신앙이 빛나고 감동적일 수 있습니다. 배타적 신앙이나 독선적 신앙, 유별나고 유난스런 신앙 태도는 광적인 신앙, 극단적인 신앙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조찬 기도회에서 통성 기도란 이름으로 대통령의 무릎을 꿇게 한 신앙 태도나, 이슬람채권이 테러 자금이 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억지 논리는 기독교의 설 땅을 좁게 만들고, 신앙의 격을 실추시키고, 국격을 저해하는 신앙의 탈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