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회 이승만포럼
    2011. 3. 9(수) 오후2:30-5 프레스센터(한국언론재단) 19층

    해방정국 초기 이승만과 공산당의 대립
    -좌우대결의 뿌리를 찾아서(1945.9-1946.2)-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박헌영의 ‘인공’조작과 ‘인공주석’ 이승만

    해방직후, 적어도 1945년 8월 16일부터 1945년 10월 하순까지의 기간 중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은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었고, 그 총비서 박헌영(朴憲永)은 영향력이 막강했다. 박헌영은 소련 KGB의 서울 책임자 Anatole Shabshin의 지도하에 공산당의 당권을 장악했고, 공산당의 당권을 무기로 좌익진영을 좌지우지 했다. 당시 여운형은 겉으로만 좌익진영의 지도자였지, 실질적 지도자는 박헌영이었다.
    박헌영은 여운형과 장안파 공산당이 주도하여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를 자기가 이끄는 재건파 공산당이 주도할 수 있는 조직으로 개편했다. 즉, 건준(建準)을 공산당 헤게모니 하에 두도록 바꾼 것이다.

  • 그러면서 박헌영은 미군의 서울 진주(進駐) 일자가 알려진 1945년 8월 말부터 민족통일전선(民族統一戰線)에 관한 ‘코민테른’의 지침에 보다 잘 부합하면서도, 남한을 점령통치할 미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통일전선 기구를 조직하는 준비에 착수했다.
    그것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박헌영은 여운형을 완전히 무시했다. 여운형에게는 새로운 기구의 구성계획이 완성된 후 9월 4일에야 통고했다.
    박헌영이 추진한 새로운 기구는 9월 6일 밤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했다. 박헌영은 인공(人共)을 조작하면서 인공 중앙위원 명단에 이승만(李承晩,1875-1965)의 이름을 넣고, 뒤이어 발표된 인공의 행정부 구성원 명단에는 주석(主席)으로 기입했다.
    그것은 이승만과 아무런 사전 연락 없이 박헌영이 일방적으로 취한 것이다.

    박헌영이 이처럼 이승만을 인공 주석으로 추대한 것은 세 가지 목적에서였을 것으로 분석된다. 세 가지 목적은, ①장차 남한에서 공산당의 최대 적(敵)이 될 이승만을 인공의 테두리에 묶어 놓음으로써 무력화(無力化)시키려는 것, ②이승만과 김구 등 우익인사들을 인공 명단에 기입함으로써 우익진영의 혼선과 무력화를 유도하려는 것, ③인공에 대한 미군정의 인식을 혼란케 하고 온건한 반응을 유도하려는 것이다.

    2. 이승만의 독촉중앙협의회 조직에 대한 박헌영의 방해

    1945년 10월 16일 미국으로부터 귀국한 이승만은 귀국하자마자, 우리 민족의 모든 정치세력이 단결하여 독립을 조속히 달성하도록 추진하는 통일 기구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처럼 초당파적(超黨派的) 단결을 이루려는 이승만의 노력에 대해 우익진영(右翼陣營)과 중도파(中道派)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좌익진영(左翼陣營)에서 여운형과 공산당 장안파는 이승만의 노력에 대해 소극적으로 동조했다.
    그러나 좌익진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공산당 박헌영(朴憲永)파만은 이승만의 노력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공산당의 동조(同調)를 끌어내기 위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방송연설을 하기도 하고, 박헌영과 장시간의 단독회담을 가지면서 설득하기도 했다.
    공산당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준비작업에 참여하면서도, 독촉중협(獨促中協)의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에서 좌익계열이 과반수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또 공산당은 이승만에게 인공(人共) 주석에 조속히 취임하라고 요구했다. 인공주석에 취임하지 않으면 이승만을 지도자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민족통일전선 분열의 최고책임자로 규정하겠다고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인공 주석 취임을 수락하지 않았다. 좌익계열도 독촉중협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공산당은 원래 통일전선 단체에 참여하면 그 단체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하고, 헤게모니 장악에 실패하면 그 통일전선(統一戰線) 단체를 파괴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한 기본전술에 따라, 공산당은 자기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독촉중협(獨促中協)을 파괴하려는 공작을 시작했다. 그에 따라 공산당이 주도하는 좌익진영은 인공 주석 취임을 거부한 이승만을 당파적 인사, 전제적 인사라고 비난하면서, 독촉중협에서 탈퇴할 뜻을 천명했다.

    당파적(黨派的) 헤게모니만 추구하는 공산당⦁좌익의 행태에 실망한 이승만(李承晩)은 1945년 11월 19일 방송연설을 통해 공산당을 비판했다. 그러자 공산당과 인민당이 독촉중협에서 탈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독촉중협에서 탈퇴한 좌익은 방금 귀국한 임시정부(臨時政府)와의 합작을 추진했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臨政) 요인들도 좌익의 인공과 합작을 추진할 것에 동의했다.
    임정의 일원으로 자부하던 이승만(Syngman Rhee)은 인공의 주석직 취임도 거부한 채 독촉중협 결성에 매진했다. 그리고는 독촉중협의 간부진 구성에 임정(臨政) 측의 견해를 반영하기 위해 임정 귀국까지 연기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귀국한 임정(臨政) 요인들은 독촉중협에서 이탈한 인공(人共)과 합작을  추진하는 동시에, 독촉중협이 임정과 무관(無關)한 단체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이승만과 독촉중협을 고립시켰다.  

      3. 민주의원 대 민족전선

    그러나 임정과 인공의 합작은 양측의 입장차이 때문에 지지부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정은 이승만과 한민당을 멀리하고 인공과의 합작을 계속 도모했다. 그리하여 임정이 임정봉대(臨政奉戴)를 부정해온 인공과는 합작을 추진하고, 임정봉대를 주장해온 이승만과 한민당은 멀리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12월 28일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信託統治) 계획을 내포한 모스크바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서울에 알려졌다.

    임정은 신탁통치반대 전국민운동을 추진했지만, 인공은 찬탁(贊託) 입장을 취했다. 이로 인해 임정⦁인공 합작 공작이 완전히 무산되었다. 그에 따라 반탁(反託) 투쟁과정에서 임정은 이승만, 한민당과 연대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와병중이어서 초기에 반탁투쟁을 주도하지 못했지만, 1946년 1월 말부터 반탁투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리고는 찬탁을 벌이는 공산당과의 대결에서 앞장서게 되었다.
    그러자 독촉중협 공작에서 이승만을 외면하고 좌익과 합작을 추진하던 임정,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임정우파는 반탁투쟁에서는 이승만과 손을 잡게 되었다.
     
    이승만⦁독촉중협과 임정 우파의 연대로 1946년 2월 1일 민족자율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가 열렸다. 반탁진영의 임시국회에 해당하는 비상국민회의는 임시행정부에 해당하는 최고정무위원회(最高政務委員會)를 구성하기로 하고, 그 인선(人選)을 이승만과 김구에게 위임했다.
    뒤이어 1946년 2월 8일에는 이승만이 이끄는 독촉중협과 김구가 이끄는 반탁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를 통합하여 우익진영의 통일전선(統一戰線) 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를 결성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각각 총재와 부총재로 추대되었다. 1946년 2월 13일 두 사람은 28명의 독촉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을 선임했다.
    다음날 주한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미군정의 최고자문기관으로 남조선 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民主議院)을 신설하고,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의 최고정무위원 전원을 의원(議員)으로 임명했다. 의장에는 이승만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민주의원은 좌익과 대결하는 우익통일전선(右翼統一戰線)의 지도부가 되고, 그에 따라 이승만은 남한 우익진영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좌익진영도 공산당의 주도하에 우익과 맞서기 위한 좌익통일전선(左翼統一戰線) 단체를 결성하려 했다. 1946년 1월 31일 그들은 인공에 참여한 좌익세력과 임정 좌파들을 끌어 모아 통일전선 결성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는  1946년 2월 15일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민전(民戰) 공동의장에는 여운형, 박헌영, 허헌, 김원봉이 선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승만과 공산당은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와 찬성을 놓고 정면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이승만과 공산당 간의 정면대결은 이승만이 1960년 4월 대통령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주요 참고도서>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서울: 현음사, 2001)
    김남식, 『실록 남로당』(서울: 신현실사, 1975)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서울: 중앙일보사, 1992)
    우남실록편찬위원회, 『우남실록 1945-1948』(서울: 열화당, 1976)
    국사편찬위원회, 『자료 대한민국사』1(서울: 탐구당, 1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