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균적인 한국여성들과 단순 비교해볼 때 일본여성들의 남다른 특징을 세 가지 가량 들출 수 있다. 덧니가 많고, 다리통이 굵다. 또 목소리에 비음(鼻音), 즉 콧소리가 나는 이들이 꽤 있다. 이 중 비음의 이유에 관해서는 도통 들은 바가 없다. 정설도 없거니와 이설이나 속설조차 귀동냥하지 못했다.
    덧니는 일본어로 ‘야에바(八重齒)’라고 한다. 한자 뜻대로라면 ‘8중’이다. 그렇다고 여덟 번 겹친 것으로 오해하지는 마시라. 그냥 덧난 이빨, 덧니를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여기에는 속설이 있다. 저 옛날 일본인들은 생선을 즐겼으나 육류는 먹지 않았다. 질긴 고기를 씹지 않았던지라 잇몸이 단단해지지 못했고, 그 바람에 툭하면 덧니가 솟아났다는 것이다. 속설이긴 해도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에 비해 다리통이 미끈하게 쑥 빠지지 못한 데는 상당히 믿음직한 곡절이 있다. 무엇보다 그런 못생긴 다리를 표현하는 일본어가 있다는 사실부터 범상치 않다. ‘다이콘아시(大根足)’. 다이콘(大根)은 무를 가리킨다. 그러니 다이콘아시는 한자 뜻 그대로 무다리다. 일본어 사전에는 “무처럼 굵고 못생긴 여성의 다리”라고 정곡을 찔러 놓았다. 따라서 빼도 박도 못할 판인데, 그렇다면 어째서 그 같은 모양새의 다리가 유독 일본여성들에게 흔한 것일까?
    첫째는 주거 공간과의 연관이다. 일본의 방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다. 한국의 딱딱한 온돌에 견주자면 훨씬 푹신푹신, 쿠션이 있다. 그러나 겨울이면 온돌과 같은 난방이 불가능하다. 부엌에서 밥을 지으면서 구들로 열기가 전해지는 난방 시스템을 다다미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방 가운데에 ‘이로리(圍爐裏)’라는 이름의 난로를 피워 실내를 데운다. 하지만 다다미에 철버덕 주저앉으면 엉덩이가 시리다. 흡사 벌이라도 받듯이 무릎을 꿇고 앉으면 바닥의 냉기가 단숨에 엉덩이를 통해 온몸으로 전해지지는 않으니까 한결 낫다. 그렇게 방한을 위해 무릎을 꿇고 살다보니 다리의 발육이 엉망진창, 저절로 무다리로 변해 버렸다.
    책상다리, 혹은 양반다리가 정좌법인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을 예법으로 치게 된 또 다른 유래가 있다. 그것은 다도, 그 중에서도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 치하에서 붐을 이룬 ‘와비차’에 기인한다.
    차의 명인 센노리큐가 완성시켰다는 와비차의 다도는 간소함과 정적(靜寂)을 모토로 삼는다. 아무런 치장을 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소박하고 수수한 다실에 모여 차 한 잔을 음미하며 허례허식을 벗어 던진 인간 본연의 다소곳한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다실이 너무 좁다는 데 있다. 좁은 곳에 보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 앉으려니 무릎을 꿇고 몸을 움츠려야 한다. 책상다리로는 그만큼 더 공간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다들 무릎을 꿇다보니 그게 다도의 예법으로 굳어졌고, 급기야는 일상생활에서의 정좌법으로 자리 잡고 말았다는 설이다.
    이와는 달리 사무라이 유래설도 있다. 언제나 길고 짧은 두 자루의 일본도를 차고 적의 기습을 경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무사들, 그들은 실내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에도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지 않았다. 반드시 무릎을 꿇은 자세를 취했다. 만약 불시에 적이 공격해 온다고 치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가 일어설 때와, 무릎을 꿇었다가 일어날 때는 간발(間髮)일망정 벌써 한 템포 차이가 나는 것이다.
    한편 최근 <정좌와 일본인>(고단샤 발간, 丁宗鐵 저)이라는 책을 펴낸 한의사의 주장은 또 달랐다. 그는 정좌가 일반화한 것이 메이지시대 이후이고, '근대 일본인'을 형성하기 위해 정부가 의도적으로 현재의 일본식 정좌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무사도의 상징으로서의 정좌를 국민들에게 교육시킨 결과, 정좌법이 널리 뿌리를 내렸다는 주장이었다.
    그렇지만 요즈음 세상은 당연히 다르다. 일본의 주택 구조도 서양을 본뜨면서 롱 다리 식탁을 놓고 의자에 앉아 지내는 식으로 패턴이 변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의 미적 감각 역시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못생긴 다리를 감추어주던 기모노보다 종아리가 드러나는 양장으로 패션이 바뀐 것도 무다리 퇴치에 한 몫 거들었다.
    물론 그런 시류의 변화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정좌법은 여전하다. 단지 일반 국민들과는 딴판으로 왕족들의 정좌법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책상다리라고 한다. 그 까닭은 각자의 상상에 맡길 도리 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왜 자동차가 좌측통행을 하느냐는 질문도 이따금 듣는다. 현재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영국(오스트레일리아를 위시한 영연방 포함)과 과거 영국의 지배를 당했던 나라, 그리고 일본이 자동차 좌측통행의 대표적인 국가이다. 좌측통행을 하려니까 핸들이 놓인 운전석이 다른 나라와는 달리 오른쪽에 있다.
    일단 우측통행의 대표주자 격인 미국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자. 서부 개척 시절의 포장마차, 그 마부석이 왼쪽이었다. 오른손에 채찍을 들고 말을 몰아야했으니까. 들판에서 마주 오는 마차와 스쳐갈 때에도 자연스레 우측통행이 이뤄졌다. 그래야 서로 편했다. 철도가 깔리면서 기관사의 자리를 마부석과 같은 위치에 만들었다. 연료통에 석탄을 퍼 넣는 화부를 위해 그렇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오른손잡이가 훨씬 많아 삽질하기 수월하게 오른쪽을 비워두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것이 자동차 우측통행으로 이어졌다는 설이다.
    일본은 어떤가? 왼쪽 허리춤에 비스듬히 일본도를 찬 사무라이들에게는 좌측통행의 수칙이 있었다. 만약 좁은 골목길에서 우측통행을 하게 되면 맞은편에서 오는 사무라이가 차고 있는 일본도와 서로 부딪치기 십상이다. 무사들 세계에서는 칼이 맞닿는다는 것은 곧 도발을 의미했다. 그런 불필요한 싸움을 미리 막느라 좌측통행을 습관화했다고 한다. 이것이 일반인의 보행규칙은 물론이거니와 궁궐 내에서의 보행 예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인력거가 등장하여 길거리가 번잡스러워지자 1889년에 인력거 영업규칙이란 것을 정하면서 좌측통행을 명시했다. 연이어 서양으로부터 승용차가 도입되면서 1900년에는 도로 단속규칙이란 것을 마련하여 사람이건 차건 모조리 좌측으로 다니도록 법제화했다.
    그러다가 태평양전쟁 패전으로 일본은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국의 점령 아래 놓였다. 당시 연합군사령부(GHQ)는 보행자나 자동차 중 하나는 통행방향을 바꾸어 혼란이 없도록 하라고 권했다. 일본정부로서는 각종 시설물까지 죄다 바꿔야하는 자동차 우측통행보다는 사람의 우측통행이 비용 면에서 한층 유리했다.
    그렇게 해서 1949년에 ‘사람은 오른쪽, 자동차는 왼쪽’의 슬로건이 확정되었다. 단 한 군데 예외지역이 있었다. 오키나와는 1978년에 와서야 비로소 이를 따랐다. 그곳은 1972년까지는 여전히 미국의 통치를 받았으므로 미국식 교통 시스템으로 운용되었고, 그걸 완전히 일본 본토 방식으로 고치는데 6년이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한국의 경부선 철도는 일본에 의해 1905년 1월1일에 개통되었다. 그 바람에 여태 우리나라에서는 철도가 좌측통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본 이들은 다 안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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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