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17일만에 덩샤오핑에 개인친서 전달"
  •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서냉전 체제가 종식을 고했을 무렵 미.중 관계는 1949년 중국의 공산정권 수립 이후 최고의 `황금기'를 맞았다.

    무역과 인사교류 활성화는 물론 미국산 무기가 중국에 대량 판매되는 등 새로운 전기를 맞던 양국 외교관계는 그러나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대형사건으로 일순간 위기에 부닥치게 된다.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北京) 한복판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에 대해 계엄군이 발포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낸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발생한 것.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17일 발간된 저서 `중국에 관해(On China)'에서 당시의 미국의 입장을 `딜레마(Dilemmas)'로 표현했다.

    톈안먼 사태로 인해 당시 미.중간 관계 개선 분위기는 미국 내부에서 엄청난 역풍을 맞게 됐다고 한다. 보수진영에서는 `공산정권의 중국은 절대 믿을만한 파트너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진보진영에서는 `미국이 민주주의 전파를 위한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부통령으로서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과 만나 양국 관계 개선방안을 논의했던 조지 H. W. 부시 당시 대통령의 고민은 깊었다.

    부시 대통령은 특히 1970년대초 국무부 소속 베이징 연락사무소 소장으로, 양국 국교정상화 과정의 중심에 섰던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갖고 있었고 그만큼 미묘한 입장이었다고 키신저는 설명했다.

    미 의회가 중국 정부에 대한 제재를 결정했을 때 부시 대통령은 고위급 교류 중단 조치를 취하는 등 행동에 나서면서도 이를 완화하려 노력했고, 급기야 6월 21일 덩샤오핑에게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 했다.

    그는 이 서한에서 덩샤오핑을 `친구'라고 칭하면서 "중국의 역사, 문화, 전통을 존중한다"며 친밀감과 예의를 갖춘 뒤 텐안먼 사태 이후 중국에 대한 미국내 비난 여론을 이해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덩샤오핑은 이튿날 즉각 미국 특사의 베이징 방문을 초청하는 것으로 화답했고, 부시 대통령은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중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스코크로프트 보좌관을 만난 덩샤오핑은 "미국이 (톈안먼 사태에) 지나치게 깊게 개입한 것은 유감"이라며 관계악화의 책임을 미국에 돌렸고 `결자해지( 結者解之)'라는 사자성어를 언급하며 미국을 압박했다고 한다.

    결국 정권붕괴의 위기를 느낀 덩샤오핑과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을 고려해야 하는 부시 대통령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양측의 대화는 끝났다.

    키신저 전 장관은 양국간 관계가 악화일로의 위기에 놓였을 때 중국 지도부가 1979년 미.중 수교의 주역인 자신을 초청했고 베이징에서 덩샤오핑 등과 톈안먼 사태의 주역인 중국 천체물리학자 팡리지(方勵之)의 신변문제를 논의했다면서 당시 대화내용을 저서에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