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조' 결성 정적 고문-총살..'3대 멸족-연좌제'로 떼죽음..'심화조'도 숙청
  • 북한을 뒤흔든 '심화조'사건의 전말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뉴데일리 객원논설위원

    1997년 '심화조' 사건을 아십니까?

  • 아마 2000년 이후 북한에서 탈출한 탈북자들 치고 ‘심화조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심화조사건’은 김일성 사후 김정일 정권으로 승계되는 과정에 북한에서 가장 컸던 대학살 사건이었다. ‘심화조’사건은 '서관히 간첩사건'으로 시작됐다. 중앙당 비서 서관히가 공개처형 당하던 날 북한 주민들은 경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일성 밑에서 오랫동안 당 중앙위 농업담당비서로 일했던 서관히여서 그 충격이 더 컸다.

    중앙당 비서 서관히, '안기부 간첩' 몰아 돌맹이 사형

    그 사건이 터지기 한 달 전 서관히는 비료 30t을 친인척들에게 장사 목적으로 빼돌렸다는 혐의를 받고 사회안전성 산하 보통강구역 안전부에 수감돼 있었다. 그때로 말하면 17만 인구의 김책시에서만 하루에 200여 명의 노동자가 굶어죽어 나가던 때였다. 누군가 식량난과 배급제 붕괴의 책임을 지지 않으면 민심이 당장 폭발할 상황이었다. 이렇게 김정일 대신 모든 죄를 뒤집어 쓴 서관히는 비료유출 경제범에서 '남조선 안기부 간첩'으로 몰려 공개처형 당했다.

  •  그날 서관히는 사격수들의 총탄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었다. “우리를 굶어죽게 한 남조선 괴뢰놈들을 찢어 죽이라!”며 격노한 군중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식량난의 모든 책임은 김일성, 김정일 때문이 아니라 남조선과 간첩들, 그리고 무능한 간부놈들 때문이라는 여론이 확산됐다.

    '용성 사건' 조작..열사릉에 묻힌 사람도 부관참시

    사회안전성 수사발표에 의하면 서관히는 6·25전쟁 시기 경력 중 조직생활에서 이탈하여 한 달간 공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문제의 한 달 동안 남한으로부터 임무와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회안전성은 자신들의 이러한 비과학적인 수사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용성 사건’을 추가적으로 감행했다. ‘용성 사건’이란 6·25전쟁 당시 남조선 특수기지에서 훈련을 받은 최고사령부 타격대 요원들이 평양 용성에 거주하며 때를 기다리다 잡혔다는 것이다.

    ‘용성사건’은 북한 중앙TV가 공개했기 때문에 그 동영상자료는 한국 정보기관에도 남아있을 것이다. ‘용성 사건’의 대상도 대부분 고령의 당 간부들이었다. 이미 죽었거나 나이가 들어 집에서 쉬고 있는 노인들을 끌어내어 공개처형했다. 중앙당 전 농업부장 김만금은 1984년에 죽어 이미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었는데 다시 파헤쳐 공개재판을 한 뒤 유골에 사격을 가했다. 옛날에나 있을 법한 부관참시였다.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조선노동당역사연구소 소장 피창협과 그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는데 피창협은 수용소에서 끝내 자살했다. 사회안전성이 이런 사건들을 연이어 조작할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일의 체제불안심리와 사회안전성 담당 행정부부장이었던 장성택의 권력야심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김정일 명령따라 '심화조' 조직...당 책임비서 첫 체포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사회안전성은 국가안전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에 완전히 밀려 사법권이 거의 제로 수준이었다. ‘서관히 사건’과 ‘용성 사건’을 계기로 김정일은 사회안전성에 북한주민 전체의 주민등록 문건 요해를 심화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어 김정일은 “내 주민등록 문건부터 요해하라”는 말로 사회안전성에 최고의 특권을 줬고, 사회안전성은 단 열흘 만에 각 도·시·군에 이르기까지 수백개의 ‘심화조’를 설치했다.

    김정일이 주민등록문건 요해를 “심화하라”고 한 문구를 그대로 사용하여 조직명칭을 ‘심화조’라고 하였으며 사회안전성에 “심화조” 총지휘본부를 만들었다. 책임자는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 대장, 지휘부 참모장은 사회안전성 참모장 황진택 상장이 맡았다. ‘심화조’가 조직된 첫날 가장 먼저 잡아들인 사람이 바로 당중앙위원회 전 본부당 책임비서 문성술이다. 국가안전보위부나 무력부 보위사령부 앞에서도 그 권세가 당당하던 당 중앙 간부들은 모두 아연했다.

    장성택, 원수 같은 문성술 검거해 복수

    본부당 책임비서를 감히 체포하려면 반드시 김정일의 사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중앙당 간부들은 김정일의 권력으로 움직이는 ‘심화조’의 실체를 피부로 느끼게 됐고, 그러한 공포 속에서 ‘심화조’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들렀다. 문성술 체포를 직접 발기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장성택이었다. 장성택에게 중앙당 본부당 전 책임비서 문성술은 원수 같은 존재였다.

    문성술은 본부당 책임비서로서 김일성 유일지도체제와 김정일 계승문제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의 친인척들 중에서 권력지향 가능성이 가장 높은 김정일의 매제 장성택을 ‘곁가지’로 철저히 감시, 견제했다. 그는 장성택 주위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포착되면 비판추궁해서 해산시켰고, 당사자인 장성택에게 직접 주의를 주기도 했다. 심지어 그의 비리를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  북한 전지역이 '피바다'...감옥에서 간부들이 총살

    북한 전역을 또 한번 놀라게 한 것은 문성술 간첩사건에 이어 평안남도 당책임비서 서윤석이 체포된 일이다. 그의 체포도 순전히 개인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심화조 총지휘부의 책임자 채문덕은 사회안전성으로 옮겨가기 전 평양시 안전국 국장을 지냈다. 서윤석은 이 시기 평양시 당책임비서였는데 질투와 욕심이 많은 채문덕을 눈여겨 보고 있다가 비리가 제기되자 당적 권한으로 혁명화 교육을 보내버렸다.

     서윤석이 아니었으면 지금쯤 더 빨리, 더 높이 출세했을 거라며 항상 불만과 증오를 품고 있던 채문덕은 장성택의 복수로 문성술을 잡아들인 후 그 대가로 장성택을 통해 김정일의 사인을 받아내어 서윤석을 체포한 것이다. 심화조 총지휘부의 책임자들부터 이렇듯 개인감정으로 출발하니 각 도, 시·군 안전부 심화조 성원들도 더 말할 여지가 없었다. 전국 곳곳에서 복수전의 피바다가 펼쳐져 평소 심화조 성원들과 앙숙이던 사람들 대부분이 고문으로 살해되거나 간첩누명을 뒤집어 썼다.

     심화조의 사법처리 방법은 중세시기에나 가능했을 무법천지였다. 감옥 수감자수를 줄이고 성과를 올리기 위해 일단 자백문건을 받아내 죄명이 인정되면 상부의 사인을 받아 감옥 내에서 총살했다. 중앙급 간부들의 처리는 직접 김정일의 비준을 받아 처리했는데, 누가 쏠지 이름까지 지명하여 친필서명이 떨어지면 그대로 사회안전성 간부들이 나가서 처형했다. 지방에서는 지방안전국 자체 결정으로 재판도 없이 총살이 집행되기도 했다.

    충성경쟁 유도하자 보위부-무력부등 실세끼리 숙청 경쟁

    김정일은 충성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사회안전성의 성과를 언급하며 국가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를 강하게 질타했다.

    하여 국가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사상 최초로 연합을 하여 역으로 사회안전성의 전횡을 비밀리에 수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국가보위부를 맡아보았던 계응태 당비서가 사회안전성의 문제점을 제기했다가 즉석에서 김일성고급당학교로 혁명화교육생으로 좌천됐다. 이어 사회안전성이 중앙당 간부들은 물론 국가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 간부들의 집도 가택수색하는 사건이 이어지자 김정일 몰래 전면돌파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 뒤에는 문성술의 뒤를 이어 장성택을 견제해왔던 당조직부 이제강 제1부부장이 있었다.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는 사회안전성 심화조 사건으로 인한 민심변화와 그 부정적 실태를 골자로 하는 정세보고서를 작성했다. 또한 그 방증자료로 간첩혐의를 강요하는 예심과정의 녹음 테이프들을 김정일에게 제출했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당, 군, 내각의 권력지반 정돈과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했던 ‘심화조’ 사업이, 본래의 취지를 넘어 전 사회적인 불안과 반감으로 전파되고 있음을 간파했다.

    김정일, 이번엔 '심화조' 문책...주민 원성 무마 나서

    또 그것이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채고 ‘심화조’를 해산하는 것과 동시에 사회안전성의 권력전횡과 고문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중앙당 조직부 검열과를 조직하고 ‘심화조’ 지휘성원들을 모두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김정일은 이어 ‘심화조사건’을 현대판 ‘민생단사건’으로 규정짓고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일가족들에 대한 사면조치를 지시했다.

    ‘민생단 사건’이란, 해방 전 일제 비밀정보기관이 한인 공산주의 세력 내에 몇 명의 스파이를 침투시켰던 사건이다. 초기에 곧 발각되고 소멸되었는데, ‘민생단 숫자가 수천명에 이른다’는 소문 때문에 공산조직 내에서 서로 의심하고 죽인 끝에 그 희생자가 정말로 수천명에 달했다는 사건이다. 김정일은 전국의 강연회에서 사회안전성 심화조의 죄행을 폭로하는 당 중앙 검열 총화결과를 공개하도록 하고, 따로 당 중앙 간부강연회에선 국가안전보위부와 무력부 보위사령부가 녹음한 테이프 자료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간부들에 한해에서만 공개됐던 테이프가 사회로 유출되면서 주민들의 분노는 더 커져 당시에는 사회안전성 안전원들이 군복입고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김정일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사회안전성 심화조 소탕작전을 벌이도록 지시했다. ‘심화조’ 주모자로 사회안전성 정치국장 채문덕과 중앙당 조직부 사회안전성 담당책임지도원 리철, 사회안전성 주민등록국 국장, 용성구역 안전부 수사과장 등 네 사람을 지목하고 장성택의 책임까지 떠넘겨 현대판 종파분자, 반혁명분자로 판결하고 총살에 처했다.

     


  • 전지역 '심화조' 책임자들 6000명 대숙청

    사회안전성 참모장 황진택을 비롯한 몇몇 간부는 징역 15~20년의 중형, 심화조 세포조직을 책임졌던 각 도·시·군 안전부장과 정치부장은 10년형, ‘심화조’에 앞장서 악독한 고문방법으로 예심조사했던 평양시안전부 심화조 여성 예심원을 비롯한 전국의 고문전문가 수백명에게는 무기징역형을, 전국의 ‘심화조’ 소속 안전원 6000명에게 출당해임 및 수감시켰다. 김정일은 인민을 탄압하는 조직이 되지 말고 인민의 생명을 보안하는 조직이 되라는 의미로 사회안전성을 인민보안성으로 바꾸도록 지시했다.

    김정일의 정치적 쇼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김정일은 수많은 사람들의 "민생단 혐의"를 자기가 직접 벗겨준다는 의미에서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던 심화조 피해자들을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석방시켰다. 그들이 인생을 다시 찾는 격정의 순간을 주민들에게 보여주라며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수용소에서 강연회 현장으로 이송할 때까지 본인들에게 석방소식을 알리지 말도록 했다. 그러나 그 통에 강연회장은 오히려 독재의 고발장처럼 돼 버렸다.

    영문도 모르고 정치범수용소에서 며칠동안 트럭에 실려 시내까지 온 초췌한 몰골의 정치범들은 큰 소리로 낭독되는 김정일 최고사령관의 석방명령이 사형판결처럼 들렸는지 “제발 죽이지 말아달라”며 애원했다. 어떤 이는 자기가 아직도 갇혀 있다고 생각했는지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희들이 죽는구나. 제발 나만 죽여라!”고 피를 토하며 소리질렀다. 그렇게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정치범석방과 가족상봉모임은 원래 3차까지 예정돼 있었지만, 첫 실험 후 역효과가 확인되자 곧 중단하고 말았다.

    이혼-자살-알거지...고문에 정신병자 되기도

    ‘심화조’ 피해자들의 고통은 그 뿐이 아니었다.
    이미 강제 이혼당해 다른 남자와 결혼한 여인들도 있었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집과 재산까지 빼앗겨 한지에 나앉은 사람들도 많았다. 하여 김정일은 일단 심화조 피해자들에게 해당 거주지의 당위원회들에서 임시로 집단거처를 마련해주고 쌀과 기름을 공급하라고 명령했다. 평안남도 당책임비서 서윤석은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봉화진료소 입원중에 간호원이 주사기를 들고 다가가자 “선생님 제발 주사는 놓지 말아주십시오, 다 말하겠습니다” 하며 무릎 꿇고 빌었다고 한다.

     심화조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스스로를 북한 주민의 구세주로 포장한 김정일은 훗날 “문성술은 신념이 투철한 사람인데 서윤석은 신념이 없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3대 멸족 연좌제> 위력...김정일, 김일성 동지들 제거 성공

    '심화조'사건으로 근 2만 여명이 사형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렇듯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가친척까지 잡아들이는 3대멸족 연좌제 때문이었다.  ‘심화조 사건’의 피해자가 대부분 북한 간부들이었던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김일성 사후 완전히 실권에서 밀려나 불평불만이 많았던 김일성의 측근들에 대한 김정일의 증오심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화조’의 수사 초점이 6.25경력자들에 맞춰졌고 실제로 수많은 김일성의 동지들이 제거 당했다.

    둘째는 당시의 식량난과 민심을 이데올로기로 돌파하려는 김정일의 의중 때문이었다.
    셋째는 국가보위부와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에 완전히 눌려있었던 사회안전성이 그동안의 열등감을 만회해보려던 과잉의욕 때문이었다.

    김정일은 이제강을 비롯한 당 간부들이 장성택에게 쌓인 불만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매제가 ‘심화조’의 실권자로 연계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여 ‘심화조’사건이 종결되고 나서 몇 달 후에야 장성택에게 혁명화 처벌을 주었다. 이제강은 2010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