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독]장수길을 둘러싼

    北 당 행정부와 군부의 대립 전말 공개



    장진성  /뉴포커스 대표, 탈북 통전부간부, 시인



  • 장수길은 1943년 3월 15일 생이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 창태리이다.
    그의 경력에서 이색적인 것은
    본처와 이혼하고 두번째로 맞은 후처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26년이라는 것이다.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무용배우였던
    장수길의 처 최숙은 1969년 11월 19일 생이다.
    장수길은 본처와의 사이에서 아들 두명을 낳았고,
    후처에게서 딸을 보았다.


    일부 언론에서는
    54부 장수길이 장성택 측근으로 처형된데 대해
    너무 사실과 맞지 않는 억측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김정일 유서까지 조작한 경력이 있는
    한 탈북자의 내부소식통 제보를 근거로
    "당 조직지도부가
    54국 장수길의 죄행을 만들기 위해 열차전복사건"
    까지 꾸몄다는
    허황한 기사를 버젓이 소개하고 있다.
     
    사람 죽이는 것이 가장 쉬운 북한 독재 체제인데
    그 정도 인명과 재산을 피해 보면서까지 숙청을 거대하게 기획하지 않는다.
    그 뿐이 아니다.
    혁명화도 개인의 충성심이 아니라
    그 처벌수위와 기간을 당에서 직접 정해주는 영도원칙이고 당규율인데
    그런 체제상식도 모르고
    처벌이 두려운 사람들이 스스로 농촌이나 탄광에 들어간다는
    [자진혁명화]란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는 판이다.
    장성택 처형 이유 중 하나가
    국방위원회 54국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어느 언론사의 기사도 이치상 맞지 않는다.
     
    54부와 장수길은 어떤 부서이고 어떤 인물인가,
    또한 장성택과 북한 군부의 대립은 어떻게 발전했는가에 대해
    <뉴포커스>가 밝힌다.

     
    54부는 총정치국 외화벌이 회사이다.
    대외명칭을 <승리무역회사>로 위장하고 1996년 신설됐다.
    그 전까지 북한 군부는 식량배급의 자력갱생을 위해
    여단까지 자체 외화벌이 회사나 기지 운영을 허용했었다.
    그러나 6군단 사건이 터지면서,
    김정일은 각 군부대 외화벌이 권한을 모두 회수하고
    통폐합하도록 명령하게 된다.
    군단급은 물론 총참모부 내 국(후방총국만은 제외) 단위 외화벌이도
    모두 없애도록 명령하는 바람에
    북한 군부에는 53부와 54부만 남게 됐다.
     
    53부는 초기 인민무력부 장비국 산하 무기판매 회사였는데
    북한 군의 대표적 외화벌이 회사였던 <매봉총회사>와 합쳐 다시 태어났고,
    54부는 <매봉총회사>의 알짜배기 과들을 합쳐
    김정일의 군 정치자금 조달 명목으로
    신설부터 비교적 규모있게 출범하게 된 것이다.
    54부는 서평양 역 앞에 본사를 두고,
    회사 창고는 30분 거리에 떨어진 형제산구역 서포동에 만들어졌다.
     
    54부는 김정일의 선군정치를 받들어 군정치 자금 조달을 위한다며
    북한 내 주요 금광-탄광-광산-어장들의 독점권을 싹쓸이했다.
    당 38호실 다음으로
    북한 내에서 두번째로 큰 외화벌이 회사였던 것이다.
    그렇듯 단기간 내 외화벌이 독점권한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총정치국 산하 회사여서가 아니다.
     
    일명 <리을설 회사>라고 할 만큼
    54부의 수출-재무-담당 과장들이 리을설 인민군원수의 친인척들로 구성됐고,
    수입 담당 과장인 리영란의 경우
    당조직지도부 군 담당 제1부부장이었던 리용철의 맏딸이었다.
    그렇듯 북한 군 수뇌 가족회사로 구성된 까닭에
    내각은 2만 달러가 없어
    김정일 특명으로 건설하던
    황해도 재령강 발전소에 필요한 타빈 한 대도
    못 사오는 형편이었지만,
    54부는,
    2003년 기준 한 달 보통 거래금액이 2,000만달러가 훌쩍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중국과 몰래 대만과의 경제협력을 추진하던
    <조선-대만친선협회>(평양시 만경대구역 팔골동에 위치)의 대외권한도
    54부가 갖고 있었다.
    54부는 2002년부터 김정일의 군정치자금에서 호위자금 범위로 확대하여
    김정일 사생활에 필요한 특각설비들과
    생활용품들을 비롯한 사치품 수입까지 취급하는
    외화벌이 1호 특권을 갖게 됐다.
     
    그렇다면 54부의 장수길 부장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장수길은 1943년 3월 15일 생이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시 창태리이다.
    그의 경력에서 이색적인 것은
    본처와 이혼하고 두번째로 맞은 후처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26년이라는 것이다.
    조선인민군협주단에서 무용배우였던
    장수길의 처 최숙은 1969년 11월 19일 생이다.
    장수길은 본처와의 사이에서 아들 두명을 낳았고,
    후처에게서 딸을 보았다. 
     
    장수길은
    북한 외화벌이 시장에서
    타고난 수완꾼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특히 그가 전설적인 인물로 화제가 됐던 이유는
    출신성분이 그닥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54부 부장이라는 지위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장수길은 처음에
    이종옥 부주석의 맏아들과 함께 골동품 장사로 시작했다.
    그의 고향이 함경북도 회령시 창태리여서
    누구보다 일찍 북중 밀무역에 눈을 뜰 수 있었던 것이다.
     
    장수길은 출신성분 때문에
    총정치국 54부 부장이었지만 군 인사권에서 배제되어
    민간인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외화벌이 사장들은
    대체로 돈이 좀 있거나, 외국과의 거래권을 갖고 편입되는 경우가 많아서
    당 조직지도부 인사범위에서 배제되는 상위 기관 소속 회사의 사장들 같은 경우
    임시직 개념에서 주요 출신성분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의 부하 직원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있어
    실적에 따라 계급도 올라갔지만,
    장수길은 한갓 장사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
    신분에 대한 심리적 갈등이 심했다.
    장수길은 첫 외화벌이 업무를
    호위사령부 소속 <청암산 무역회사>에서 시작했다.
    그 인연으로 54부도 리을설 가족과 함께 구성할 수 있었다.
    중국 상인들 속에 [신뢰할만한 인물]로 소문나 있고 대인관계도 원활하여
    54부의 대외명칭인 <승리무역회사>의 오너로써
    이익이 되는 계약건들을 수없이 따냈다.
     
    김정은 정권이 들어선 후
    장수길은 항상 군 내에서 신분갈등에 고민했던 터라
    장성택에게 접근하게 됐고,
    또한 장성택은 군의 외화벌이를 위축시킬 목적으로
    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장수길이 장성택의 행정부로 옮기는 준비과정에 있던 2012년 초에는
    조명록 사망으로 북한 군 총정치국 국장이 공석상황이었다.
     
    하여 군의 수뇌로 있던 리영호총참모장과 장성택은
    장수길의 인사이동을 떠나
    그가 54부에서 추진해왔던 중국과의 계약권까지 모두 갖고 옮기는데 대해
    대립할 수밖에 없게 됐다.
    장수길을 따라 당 행정부로 계약을 옮기려는 중국 회사들이 늘어나면서
    장수길 개인 문제는
    당 행정부와 군부와의 조직적인 대립,
    한 발 더 나아가서
    군부의 외화벌이 권한축소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듯 김경희의 경제부서와 내각으로
    군의 외화벌이 독점권들을 옮길데 대한 논쟁이 심화되는 과정에
    결국 리영호는 숙청되고 말았다.
    장성택과 김경희의 강력 추천으로
    최룡해가 군 총정치국 국장으로 임명되면서
    마침내 장성택의 권력입지는 완전히 보완된 듯 싶었다.
     
    그러나 정작 군복을 입고 나니
    민간인 출신 최룡해는
    당 조직지도부와 군부의 보이지 않는 위협에 포위된
    자신의 처지를 피부로 느끼게 됐고,
    결국 당 조직지도부 편에 서서
    장성택을 상대로
    총정치국의 54부 권한 회복을 다시 조심스럽게 주장하게 됐다.
     
    장성택에겐
    그런 최룡해가
    자기 심복,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철저히 무시했고,
    자존심이 상한 최룡해는
    군 인사권과 당 생활지도권한으로
    군을 빈틈없이 장악하고 있는 당 조직지도부의 대세에 편승하여
    국가보위부 김원홍 제1부부장과 함께
    장성택 처형을 면밀히 주도하게 된 것이다. 
     
    끝으로 이번 장성택 처형을 계기로
    우리 언론에서 심각하게 교훈을 찾아야 할 점이 있다.
    검증되지 않은 제보들을 확인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기사화하고,
    그 오보들에 대한 반성의 책임감도 보이지 않는 행태이다.
    북한 권력 내부를 그렇게 실시간으로 잘 알았던 제보자들이
    당 조직지도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왜 전혀 몰랐으며,
    또 그 전에 장성택 처형 소식을 왜 미리 감지하지 못했단 말인가,
     
    최소한 거짓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자기 명예를 걸고 언론을 상대할 줄 아는 사람들의 증언이 아니라
    사태를 극대화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일단 쓰고부터 보자는 것은
    언론이 할 짓이 아니다.
    오보의 책임을 제보자에게 돌리는 것도
    사실 거짓말 한 사람보다 더 나쁜 거짓이다.
    자기들의 감짝쇼를 위해 거짓말을 대놓고 하는 사람들이나,
    또 그 방조자 역할을 하는 언론이나,
    궁극적으로 탈북사회 전체와 해당 언론사의 신뢰도 추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국내최초 탈북자신문 뉴포커스=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