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이승만史 (1) 부산정치파동⓳ [독립정신]을 모르면 이승만을 모른다!

    대통령의 '민주화' 혁명! 386이 흉내내더니 이젠 헌법 역주행!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 서울 중앙철 광장에서 1952년 8월15일 개최한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첫 직선대통령 취임이다.(자료사진)
    ▲ 서울 중앙철 광장에서 1952년 8월15일 개최한 제2대 대통령 취임식. 첫 직선대통령 취임이다.(자료사진)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 하나의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비록 비폭력 무혈혁명이지만 혁명임은 사실하다.
    세계에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고 이승만의 개헌 방식에 ‘독단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으며
    이때부터 흔히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글은 이승만의 오랜 정치고문 미국교수 로버트 올리버가 20여년뒤 1978년에 펴낸
    그의 책에서 부산정치파동을 정리하는 기록중의 한 대목이다.
    평생의 꿈이던 ‘직선제 대통령’ 헌법을 만들어낸 이승만은 벌써 ‘독재자’가 되어 있었다.

    예전 독립운동할 때 반대파들은 물론, 조선 공산당, 미국 국무성과 언론들이
    그를 '독립병자' ‘고집쟁이’ ‘독선주의자’ ‘독재자’로 불렀으며,
    해방후 3년간 건국투쟁에서 그것은 소련-중공이 가세하며 더욱 심해졌다.
    올리버도 이런 과거를 알고 있지만 이번에 비상계엄령을 동원한 개헌방식이
    그들로 하여금  이승만을 부동의 독재자로 공격하는 결정적 핑계를 제공했다는 말이다.
    공산당등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던 좌익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민국당등 한국정당들과 그들이 발행하는 신문사들은 이제 마음놓고
    이승만을 독재자로 부르고 비난해도 좋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국당은 한민당 시절부터 내각제 개헌을 위해 ‘이승만 독재 규탄’을 시작하였고,
    이번 개헌파동에도 미국 대사 무초의 선동에 힘을 얻어 ‘독재 규탄, 헌법 수호’ 궐기대회까지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결국 ‘이승만 독재자’를 만든 선봉장은 미국 정부와 언론이다.
    휴전의 걸림돌 이승만을 민주절차(국회 간접선거)로 추방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의 국민동원 리더십 앞에서 타협할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던 미국이
    앞으로 무엇으로 미국의 장애물 이승만의 파워를 견제할 수 있을까.
    미국식 잣대로 약소국을 지배하는 방법은 한국에도 그 ‘독재자 카드‘ 뿐이다. 
    한국 야당과 언론, 미국의 직간접 조종, 남북한의 공산당 선동 등
    사면초가의 '독재자 공세' 속에서 시달리고 시달리는 이승만 대통령,
    그리하여 4.19 데모로 하야할 때까지, 오늘날 이 시간까지 ‘독재자 누명‘은 여전하다.
    이승만 뿐인가. 자기들 요구를 안들어주면 이명박도 박근혜도 '불통' '독재자'가 된다.
  • 올리버가 첫 눈에 반해버린 이승만의 얼굴.(자료사진)
    ▲ 올리버가 첫 눈에 반해버린 이승만의 얼굴.(자료사진)
    "하나님, 감사합니다"...국가기반 국민 직선제 완성에 자부심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백성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기도에 항상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제가 젊어서부터 지금까지 올렸던 기도를 버리지 않으시고, 언제 죽을지 모를 이 늙은 몸을 이용하여 주셔서 하나님의 뜻으로 진정한 헌법까지 만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 국민은 이제 하나님의 충직한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정의를 받들어 용기를 가지고 남북통일까지 쓰러지지 않고 나아가게 인도하여 주십시오. 자유의 적과 싸우는 전쟁터에서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국민들의 희생이 너무 크옵니다. 저는 지금 하나님의 기적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디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
    자나깨나 기도, 앉으나 서나 기도, 기도로 눈을 뜨고 기도로 일을 하고 기도로 잠드는
    기도의 인간 ‘하나님의 종’ 이승만은 국회개원이래 그래왔듯이 직선제 개헌도
     ‘하나님의 역사’로 믿어 감사드리는 기도 항목이 하나 더 늘어났다.

    그는 기자회견에서도 여러 차례 자기의 뜻을 분명히 공표하였다.
    “우리 국민이 자기가 원하는 국가지도자를 직접 뽑을 수 있도록 대통령 직선제가 헌법으로
    보장해주어야 하며, 통일이 되면 이북의 총선거를 실시하고 즉시 상하 양원제가 실현돼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독립을 위해 구상해왔던 일들은 대강 끝나는 셈이다.”
    이승만에게 ‘직선제’ 개헌은 건국 시나리오의 마지막 챕터에서 ‘서둘러 건국하느라 빠져버린’
    장면을 다시 재생시켜 미완의 헌법을 완성시킨 작업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이승만은 독일의 유명한 잡지 [칸츨리트: Kanzlit]의 요청에 따라
     ‘개헌과 건국4년’에 대한 발표문을 보내, 자신의 평가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이제 시작 단계에서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 인플레의 극한적 상황에
    시달리고 있지만, 우리의 헌법 개정은 폭력 없이 압도적인 국민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졌다.
    새로운 헌법 아래에서 민주주의는 한국 역사상 어느 때보다 확고하게 뿌리는 내리게 되었다.
    우리는 지난 4년의 기록에 자부심을 가질 만 하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토지개혁 프로그램 성공으로 소작농이 사라졌고, 교육자원은 일제 식민지 35년보다
    4배나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지난 4차에 걸친 전국규모 선거 참여율이 평균 90%에 달한다.
    공산당의 선전공세와 국민이 선출한 민주정부 전복과 암살 음모는 완전히 실패하였으며,
    강대국의 각축장에서 중립주의라는 불확실성 대신에 유엔과 뜻을 같이 할 것을 선택함으로써
    엄청난 고통의 대가에도 불구하고 세계 민주우방들은 우리의 충정을 잘 알고 도와주고 있다.
    금년 4월과 5월에는 과거 지명직이던 1만7천여명 지방 공직자들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였고,
    비판의 자유와 정치참여의 자유가 보호되고 자유로이 행사되었음을 유엔이 증명한다. 
    최근 몇몇 중동 남미 국가에서 폭력적인 혁명운동이 일어나 정권이 교체되었지만
    우리는 국민들이 비폭혁 혁명을 달성한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신생 4년짜리 국가로서
    유엔의 이상을 이만큼 실천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이보다 더 잘 입증할 수 있을지
    나는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우리 국민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수 있게 되었고
    대한민국은 국민의 주권의식에 기반을 두게 되었으니, 이런 기반 없이는 독립된 나라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세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독립국가의 기반, 그 필수조건으로서의 대통령 직선제, 즉 국민주권을 말하고 있다.
  • 직선제 개헌후 '국회의원 소환'등 7개항 보충수정안을 제안한 이승만. 52.7.19일자 조선일보ⓒ조선DB
    ▲ 직선제 개헌후 '국회의원 소환'등 7개항 보충수정안을 제안한 이승만. 52.7.19일자 조선일보ⓒ조선DB
이승만은 이 기반을 보다 튼튼하게 완전한 헌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직선제만으로 불충분하므로
7개항의 헌법조항을 더 고쳐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① 민국의 정체(政體)를 변동하거나 독립운명에 관한 문제는
   투표권자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② 대통령이 고의로 민의를 무시해서 위기를 일으킬 때도 3분의 2로 탄핵할 수 있게 한다.
③ 국회의원이 뇌물을 받고 의원 직권을 행사했을 때는 언제든지 검가하며
   재판에서 유죄가 되었을때는 평민보다 중벌에 처하게 한다.
④ 국회의원이 민의를 위반하고 사심을 주장하여 국정에 많은 혼란을 끼칠때는
   선구민 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소환할 수 있게 한다.
⑤ 정부 각료 등 공무원이 뇌물을 받거나 공전(공금)을 쓴 범죄가 드러날 때는
   평민보다 중벌에 처하게 한다.
⑥ 행정부, 입법부와 사법부가 각각 자기 권리만  주장하고 알력이 생겨 국가의 위신과 안위를
   불고하여 민국의 중대한 문제가 일어날때는 국민투표로 임시재판소를 구성해서 판결 시행게      할 것.
⑦ 어떤 단체나 개인을 막론하고 국가 권위와 위신을 무시하고 외국의 세력을 의지해서
   민국을 방해하는 자는 공적(公敵)으로 인정해서 증거가 드러날 때는 중벌에 처할 것.

이 7개항을 보면, 이승만이 당시 국회와 정치인들의 언행에 얼마나 큰 불만과 문제의식을
가졌는지 한 눈에 보인다. 좌익분자들의 국가 정체 변혁 움직임을 비롯하여 국가 위신을 추락시키고 외국 돈을 받아 활동하는 ‘매국 행위’등을 엄벌에 처해야할 시급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당시 국회상이라 할까. 특히 정권교체를 위해 미국 자금지원을 받는 야당 지도자들에게
넌더리를 낸 이승만은 이들을 ‘국가의 공적’으로 반역-반란죄로 다스리고 싶었을 것이다.
이 제안들은 그러나 그후 헌법연구회를 만들어 토론까지 벌였지만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때 이들 7개항이 헌법에 반영되었더라면 오늘날의 국회 정치는 보다 선진적인 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툭하면 국회독재와 국회해산론이 나오는 ‘여의도 정치’ 행태가
 이승만의 선견지명이 실현되지 못한 안타까움을 더해 주고 있다.
  • 이승만 대통령의 오랜 홍보고문이자 친구, 로버트 올리버. 사진은 1995년 조선일보가 개최한 '이승만 나라세우기' 전시회에 초청되어 내한한 노년의 올리버.(자료사진)
    ▲ 이승만 대통령의 오랜 홍보고문이자 친구, 로버트 올리버. 사진은 1995년 조선일보가 개최한 '이승만 나라세우기' 전시회에 초청되어 내한한 노년의 올리버.(자료사진)
    "절제된 위엄에 반했다" 올리버의 [독립정신] 읽기

    피난수도 부산에 이승만을 따라와 대외홍보 작업을 돕던 올리버는 77세 노대통령에게
    가끔 “무리하지 마시라”고 쓴 소리를 했다고 한다. 40일간 개헌투쟁으로 과로한 뒤에도 ‘완전한 헌법’ 만들기에 집념을 놓지않는 그가 걱정되어 과중한 업무를 줄이고 휴식을 취하라 해도
     무시하는 듯 웃으면서 이승만은 이렇게 답하곤 하였다.
    “신체 근육은 써야 튼튼해지고 쓰지 않으면 힘이 빠지는 법이오. 그건 두뇌도 마찬가지요. 
    휴식이 아니라 일을 많이 해야 운동이 되오.”

    올리버가 이승만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9월중순 워싱턴 코네티컷 애비뉴의 숄스 카피테리아(Sholl’s cafeteria)에서였다. 백악관과 국무성에 인접한 라파예트 광장에 가까운 그 식당은 미국 정부 중견관리들이 애용하는 ‘정책 토론장’이어서 외교와 로비에 안성맞춤이었다.
    한달전 영문저서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Out]을 출판한 이승만은 “때가 임박한지라”
    본격활동을 위한 미국인 고문을 구하는 중에, 이승만도 절친한 한국태생 미국인 선교사 전킨(E. Junkin)에 부탁하여 대학교수인 올리버를 만난 것이었다.
    때가 임박했다는 인식은 이승만의 책에 잘 나와있다. 일본이 조만간 미국을 공격하리라는 예언, 미국은 이길 것이고 따라서 한국의 독립도 임박했다는 통찰력이 이승만을 서두르게 하였다.

    “67세의 적지않은 나이에도 젊은이 같은 패기 넘치는 얼굴에서 독립투쟁의 긴 세월 고초를 겪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박사는 언변이 좋았다. 적절한 어휘 선택과 나무랄 데 없는 또렷한 발음으로 쉽고 조리있게 말을 구사하는데, 말 보다 그의 온몸으로 표현하는 웅변이 극히 인상적이며 빛나는 눈과 입술의 미소가 풍부한 유머 감각과 진지함이 함께 묻어났다. 무엇보다 강한 것은 그의 절제된 품위였다. 침착함과 자신감이 결연했지만 도를 넘치 않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은 대인이다. 자제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설명은 뭔가 알아내려는 탐구적이면서도 상대의 말도 경청할 줄 아는, 즉 소통에 신경을
    많이 쓰는 소통의 달인이었다. 세련된 교양의 지적수준에서 우선 압도되고 만다.”
    첫 만남에서 자신의 생애와 한국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이승만과 마주앉아 넋 잃은 34살 차이 젊은 교수는 한마디로 고매한 스승의 ‘절제된 위엄’에 감복하였다고 썼다.
    그날부터 이승만을 돕고 싶어져 미국 신문 잡지에 ‘잊혀진 나라-한국’을 비롯한 글들을 쓰기 시작하였고 47년부터 정치고문으로 관계를 맺은 올리버는 건국과정과 6.25까지 ‘이승만의 그림자’처럼 미국 정부와 여론을 겨냥하여 한국 홍보활동에 올인한다.

    그즈음 부산에서 올리버가 ‘이승만 스토리’ 책을 쓰고 싶다고 말하자 이승만은 웃기부터 했다.
    “당신은 나를 결코 올바르게 표현하지 못할 것이오. 나 라는 사람은 주위 환경에 지배되기 보다는 내 신념에 따라 콘트롤되는 인간이란 걸 먼저 이해하지 못한다면....물론 어것 때문에 자주 곤경에 처하지만 말이오”
    꼭 10년간 이승만을 겪어본 뒤 ‘내가 깨달은 것은 이승만은 세속적이면서도 동시에 신비스러운 인간’이란 점이라고 고백한 올리버는 그의 책 제목도 [이승만: 신비속의 인물/ Syngman Rhee: The Man bihind the Myth]이라고 붙였다.(1954년 발간)
  • 로버트 올리버가 쓴 '이승만: 신비에 가린 인물' 책 표지(자료사진)
    ▲ 로버트 올리버가 쓴 '이승만: 신비에 가린 인물' 책 표지(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