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대통령의 측근이 되어 역사를 바꾼 간첩 앨저 히스 이야기

    루스벨트 대통령이 총애한 그는 유엔 창립의 실무책임자였고
    얄타 회담에도 참석하였다. 그는 소련에 포섭된 고정 간첩이었다.

    趙甲濟      
       


  •  짐 비숍이 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마지막 해’(FDR'S LAST YEAR)라는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하였다. 1945년 2월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있었던 회담의 이야기이다.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은 2차 대전의 終戰을 앞두고 戰後 질서를 재편성하는 중요한 회담을 한다. 독일과 폴란드 등 유럽의 운명이 이때 결정되고 한반도의 분단도 이 회담과 관련이 있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소련군이 참전, 일본을 공격하면 사할린과 만주 등 동북아에서 소련의 이익을 보장하여주기로 약속하는 것이다.

     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루스벨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미국 대표단의 일원이던 제임스 번스 전쟁동원국 국장(사우스 캘로라이나 상원의원 출신, 후에 국무장관)이 말하기를 얄타 회담의 합의를 조약으로 규정할 경우 미국 상원의 비준이 없으면
    대통령이 서명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은 1차 대전 후 베르사이유 회담에서  합의한 ‘국제 연맹’ 창립을 조약으로 간주, 상원의 비준을 받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윌슨이 세계평화 기구로 구상한 국제연맹은 미국의 참여 없이 발족, 반신불수가 되었다.      
     
     루스벨트는 고민하다가 앨저 히스를 데려오라고 한다.

    히스는 미 국무장관 에드 스테티니어스의 보좌관으로 얄타에 와 있었다. 루스벨트는 하버드 대학 출신의 이 젊은 변호사를 ‘변호사의 변호사’라고 여기면서 총애하였다. 그는 유엔 창립의 실무 主役이었다. 유엔헌장의 초안을 마련한 것도, 유엔 안보리를 만든 것도, 상임이사국도, 거부권도 히스의 발상이었다.
     루스벨트의 지시에 따라 스테티니어스는 히스를 찾아서 데려왔다. 루스벨트 대통령, 번스, 히스 세 사람은 같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얄타 합의를 조약으로 규정하지 말고 다른 것으로 포장하여 상원의 비준을 피하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돌파구를 마련한 이는 루스벨트였다. 그는 “됐어!”라고 말하더니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얄타 합의를 조약이라고 하지 말고 ‘성명’(statement)이라고 하자. 이 성명서 안에서 ‘우리가 합의를 보았다’고 표현하자.”
     히스는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겠다”고 자문하였다. ‘성명’이라고 하지만 내용은 조약이나 마찬가지이다.

    루스벨트는 성명서에서도 ‘세 나라의 지도자가 합의하였다’는 표현 대신에 ‘세 사람이 합의하였다’고 하자고 했다. 이렇게 하여 얄타 회담의 합의는 미국 상원의 비준 대상이 되지 않고 戰後 질서를 재편하는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국무장관 등 미국 지휘부가 앨저 히스를 얼마나 총애하였는지, 히스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루스벨트가 身病으로 죽어가면서도 생애 끝까지 집착하였던 유엔의 설립 업무를 히스에게 맡긴 것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문제는 히스가 당시 소련의 간첩이었다는 사실이다.
    히스가 얄타 회담에 참석, 미국의 회담 전략을 정확히 알거나 그 전략을 만드는 입장에 있었으니 스탈린은 히스를 통하여 미국의 동향을 소상히 파악, 적절히 대응하였을 것이다.   

  •  자발적인 간첩

     루스벨트 대통령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의 세계 질서를 관리하기 위하여 만든 두 기구가 IMF와 유엔이다. IMF와 유엔이 다 소련에 포섭된 미국 엘리트 간첩의 주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는 당시 미국 관료 및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親蘇化(친소화)되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다. 소련 정보기관이 2차 대전 때 미국과 동맹 관계가 된 상황을 십분 활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IMF 창설의 미국 측 책임자 해리 덱스터 화이트와 유엔 창립의 미국 측 실무 책임자 앨저 히스의 正體(정체)를 폭로한 사람은 주간지 타임의 외신부장이던 위터커 챔버스였다.
    그는 1924년 대학을 중퇴하고 미국 공산당에 들어가 당의 문학잡지 편집자로 일하던 중 黨의 지시를 받고 1934년부터 지하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활동이란 게 미국 내 소련 간첩망의 일원으로 비밀문서나 정보를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미국 정부 내의 간첩들이 건네주는 문서를 사진으로 찍어 소련 공작원에게 전달하고 원본을 돌려주는 식이었다.
    1930년대 후반 그는 불안해졌다. 소련으로 불려가 숙청될까 겁이 났다.
    1938년 4월, 그는 미국 공산당을 탈퇴하고 타임에 취직하였다. 기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하여 외신부장이 되었는데, 반공적인 글을 많이 썼다.

     챔버스는 소련 측이 자신과 가족에게 보복을 해오지 않을까 걱정했다. 1939년 8월, 원수지간이던 히틀러와 스탈린이 獨蘇(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자 자신의 안전은 물론이고 미국도 위기를 맞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소련 간첩망의 활동상을 직접 설명하려고 면담을 신청하였으나 국무부 차관보 아돌프 벨레가 대신 나왔다. 챔버스는 벨레의 자택에서 그가 아는 정보를 털어놓았다. 벨레는 기록은 했으나 FBI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소련 간첩에 관련된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했다.
     
     FBI가 챔버스를 처음 인터뷰한 것은 1942년이었다. 그 뒤에도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소련에 포섭되었던 미국인 간첩 엘리자베스 벤틀리가 전향, 의회에서 미국에서 활동중인 소련 간첩망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急死(급사)한 전임자 루스벨트와는 달리 소련과 공산주의에 적대적이었다.
    美蘇(미소) 관계도 악화되던 시기였다. FBI는 다시 챔버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미국 의회도 조사를 개시하였다.
      
       히스가 소련에 넘겨준 文書
      
       1948년 8월3일, 전향한 간첩 챔버스는 미 하원 非미국활동조사위원회에 출석, 여러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라고 폭로하면서 앨저 히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8월17일 캘리포니아 출신 초선 하원의원 닉슨은 히스와 챔버스 두 사람을 조사위원회로 불러 대질 신문하였다. 히스는 챔버스를 약간 아는 사이라고 했으나 공산주의자였다는 주장을 부인하였다.
       당시 44세이던 히스는 카네기 재단의 대표로 있었지만 그 전엔 국무부의 엘리트 관료로 명성을 남겼던 이였다. 하버드 법대 졸업생인 히스는 대법원 판사의 서기로 일하다가 변호사를 개업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하자 여기에 참여하면서 워싱턴에서 활동하다가 1936년 국무부에 정착, 요직을 거쳤다. 1945년 초 얄타 회담 때 루스벨트 대통령을 수행한 국무부 팀의 일원이었다. 그 직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 조직을 위한 준비 회의 사무총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FBI는 챔버스와 벤틀리가 제공한 정보를 기초로 하여 히스를 內査(내사)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국무부는 그를 사임시켰으나 존 포스터 덜레스(나중에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아 카네기 재단의 대표로 일하게 되었다.

       히스는 챔버스에게 면책특권이 보장된 의회에서 그런 주장을 하지 말고 바깥으로 나와 공개적으로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해보라’고 도전하였다. 챔버스가 그렇게 하자 명예훼손 혐의로 提訴(제소)하였다.
       1948년 11월4일 챔버스는 재판 증언에서 “히스는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소련 간첩이었다”고 폭탄 발언을 하였다. 열흘 뒤 챔버스는 物證(물증)을 제시하였다. 그는 미국 공산당을 떠나기 전에 히스 등 미국인 간첩들이 자신을 통하여 소련 공작원에게 건네준 문서들을 복사하여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스가 국무부의 비밀문서들을 肉筆(육필)로 요약한 메모, 타이프라이터로 옮겨 적은 문서 등이었다. 그는 이 문서들을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호박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숨겨두었다가 다시 꺼냈다. 언론에 의하여 ‘호박 문서’로 불리게 된다. 챔버스는, 이것은 히스가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 사이에 소련 측에 넘겨준 문서중 샘플이라면서 타이프를 친 이는 히스의 부인이라고 폭로하였다. 전문가들은 히스의 필적이 맞다고 감정하였다.
      
       有罪 선고 44개월 복역
      
       미 하원은 이런 물증 등을 근거로 하여 별도로 히스를 僞證罪(위증죄)로 고소하였다. 간첩죄의 時效(시효)는 이미 끝난 뒤였기 때문이다. 1949년 6월1일부터 재판이 시작되었다. 챔버스는 배심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처음엔 히스가 공산주의자이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했다가 이를 번복한 점이 신뢰를 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증언 태도도 불량하게 보였다. 히스의 변호인은 날씬하고, 핸섬하며, 논리적인 피고인을 ‘모범적인 미국시민’으로 연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변호인은 히스가 비밀문서를 작성하는 데 썼다고 챔버스가 주장하였던 타이프라이터를 증거물로 제출하였다. ‘히스는 이것을 1937년 12월에, 즉 챔버스가 문서를 받았다고 주장한 날짜 이전에 家庭婦(가정부)에게 주었다’고 알리바이를 주장하였다. 이 가정부와 아들은 법정에서 히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을 하였으나 말에 조리가 없었다. 7월8일, 배심원단은 기소 찬성 8, 기소 반대 4로 평결하였다. 만장일치라야 기소가 가능하다.
       미국 정부는 재판을 다시 하기로 하였다. 11월17일에 시작된 재판에서 검사는 히드 매싱이란 증인을 내세웠다. 매싱은 소련 간첩이던 시절에 히스가 자신의 조직원이던 노엘 필드라는 또 다른 국무부 간첩을 그의 조직으로 빼내 가려 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두 번째 재판에서 히스는 유죄 선고를 받고 44개월간 복역한 뒤 1954년에 석방되었다. 히스 사건은 이게 1막이었다.
      
       미국의 이른바 진보진영(좌파, 공산주의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은 히스가 우파에 의한 마녀 사냥의 희생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히스를 미국 판 드레퓨스로 만들려 했다. 히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혀내면 우파뿐 아니라 온건 좌파에게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계산하였다. 수많은 음모론이 난무하고 취재 및 저술활동이 전개되었다.

       챔버스는 1952년에 ‘증인’이란 제목의 회고록을 냈다. 내용은 흥미진진하였다. 공산주의자를 거쳐 간첩이 되었다가 반공주의자로 표변, 폭로자로 낙착된 자신의 방황과 고뇌와 번민이 감동적으로 묘사되었다.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히스도 1957년에 ‘여론의 법정에서’라는 회고록을 썼다. 美 의회 조사위원회와 법정 자료를 너무 많이 인용하여 재미가 없다. 자신의 성장과정이나 국무부 생활에 대하여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억울하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처럼 감정이 없는, 건조한 이야기만 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냉전이 끝난 뒤 正體가 드러나다
      
      히스의 결백을 주장하는 책이 세 권 더 나왔으나 설득력 있는 反證(반증)은 없었다.
    한편 하원의원 시절 히스를 법정에 세운 닉슨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히스는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닉슨이 같은 수법으로 자신을 옭아매었다고 주장하였다. 世論(세론)도 히스에 유리하게 돌았다.
    히스는 자신을 냉전의 순교자로 그렸고, 대학교에서 인기 초빙 강연자가 되었다. 1975년 매사추세츠 주 변호사회는 히스를 다시 가입시켰다. 그의 무고함을 뒷받침하는 듯하였다. 

       이 무렵 알렌 바인스타인이란 역사 연구가가 등장한다. 그는 히스가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조사를 시작하였다. 챔버스와 히스를 잘 아는 80명을 인터뷰하였다. 東歐(동구)와 이스라엘에 가서 전직 소련 정보기관원들도 만났다. 히스에게 불리한 사실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히스의 변론자료를 얻어 읽어보니 검사에 의한 증거 조작설을 부정하는 자료들이 발견되었다. 그러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1976년에 ‘僞證(위증)’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히스를 틀림없는 소련간첩이라고 못 박았다.
       이 책을 둘러싼 左右(좌우) 진영의 논쟁도 뜨거웠다. 바인스타인이 워낙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면밀한 구성의 책을 낸 덕분에 시간이 지나자 좌파의 반론이 힘을 잃게 되었다. 이 책 이후엔 히스 편을 드는 출판이 끊어졌다.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은 이미 사망한 챔버스의 反共 활동을 기려 그에게 ‘자유의 메달’을 주고, 챔버스가 자료를 숨겼던 농장은 국가역사지구로 지정되었다.
      
       冷戰 종식 뒤 결정적 자료들 나와
      
       1990년을 前後하여 소련과 동구 공산체제가 붕괴되자 히스 논쟁은 再燃(재연)하였다.
    히스가 선수를 쳤다. 1992년 5월, 러시아 군사자료실의 책임자이고 평판이 높은 역사학자인 디미트리 볼코고노프 장군에게 편지를 써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달라고 했다. 장군은 히스에게 답장을 보냈는데, ‘그런 자료는 없으며 히스에 대한 비방은 근거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히스는 좋아했으나 바인스타인과 다른 역사연구가들이 볼코고노프가 과연 제대로 자료를 검색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다. 볼코고노프는 곧 새로운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자신이 KGB 자료만 뒤졌다고 했다. 히스는 KGB가 아니라 소련군의 정보기관(GRU)을 위하여 간첩질을 하였으므로 엉뚱한 검색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히스에게 불리한 자료들이 잇따라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1992년 한 헝가리 역사연구가는 노엘 필드(미국에서 東歐로 도망친 국무부 간첩)에 대한 헝가리 비밀경찰의 신문 조서에서 히스가 필드를 자신의 조직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고 진술한 부분을 찾았다. 1996년 10월 미국의 CIA와 NSA(국가안보국)는 1930, 40년대의 소련 암호 해독 자료를 공개하였다.
    이게 결정타였다.

       1945년 3월30일자의 소련 암호 電文(전문)은 이런 요지를 담고 있었다.
       <알레스(Ales·암호명)는 1935년 이후 소련 군사정보 기관을 위하여 일하는 미국 간첩인데, 얄타 회담에 참석하였다가 모스크바를 방문, 당시 소련 외무장관 비신스키를 만났고, 이 자리에서 비신스키는 알레스의 활동에 감사하였다.>
       얄타 회담 이후 모스크바로 간 미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를 수행한 이가 히스였다.
    히스의 正體(정체)는 냉전이 끝나면서 비로소 확정되었다.
       1996년 11월24일 클린턴 대통령이 CIA 국장 후보로 지명한 앤서니 레이크(전 대통령 안보 보좌관)는 방송 인터뷰에서 “당신은 히스가 간첩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레이크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나는 두 서너 개의 책을 읽었는데 그가 스파이였을 것이라는 心證(심증)을 주는 많은 자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확정적인 사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화당 의원들과 보수파가 레이크의 애매한 태도를 집중적으로 공격, 결국 그를 낙마시켰다.

       히스가 간첩이란 사실이 확정되면서 미국 공산당의 정체에 대한 논쟁도 정리되었다. 미국의 자칭 진보파는 미국 공산당을 일종의 자발적 民權(민권)운동 단체인 것처럼 변명하고, 보수파는 이 당이 자진하여 소련의 하수기관으로 전락하였다고 공격하였다. 히스의 무고함을 40년 이상 주장해오던 진보파의 패배로 미국 공산당의 순수성도 부정당하였다.
      
       李承晩이 소련 비판하자 화를 낸 히스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독립투쟁을 하던 李承晩(이승만)은 이 히스와 惡緣(악연)이 있었다. 1941년 12월22일에 워싱턴을 방문한 영국 수상 처칠은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만나 전쟁협력을 위한 회담을 했다. 이에 따라 1942년 1월1일에 연합국 선언이 나왔는데 망명정부를 포함한 26개국이 서명하였다. 李承晩은 헐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 임시정부도 이 선언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려 하였다. 국무부에 갔으나 헐은 만날 수 없었고, 극동국장 스탠리 혼벡과 그의 보좌관 히스를 면담했다.
    孫世一 선생이 월간조선에 연재중인 ‘李承晩과 金九’에 따르면, 히스는, 李 박사의 제안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없다고 말했다. 李承晩은 임시정부의 승인이 왜 중요한가를 다시 설명했다. 그는 소련이 시베리아 교역의 거점이 될 不凍港(부동항)을 한국에 확보하기 위하여 지난 반세기 넘게 호시탐탐해 왔다고 말하고, 미국이 미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과 같은 조치를 해 놓지 않으면 일본이 패망한 뒤에 틀림없이 소련은 한국에 진입하여 점령하고 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히스는 李承晩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미국의 중요한 戰時(전시)동맹국을 공격하는 것을 조용히 듣고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히스는 한국에 관한 문제는 일본이 패망한 뒤에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히스는 소련을 조국으로 여기면서 정보를 열심히 건네주고 있었으니, 李 박사의 소련 비판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얄타 회담의 최고 비밀 관리
      
       히스는 1996년에 죽었다. 그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소련 간첩임이 확정된 뒤에도 히스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이들이 활동중이다. 2007년 4월엔 뉴욕 대학에서 ‘앨저 히스와 역사’란 제목의 회의를 열었다. 끈질기게 히스를 비호해온 좌익 잡지 ‘더 네이션’의 편집장 빅터 나바스키가 기조연설을 하고, 히스의 養子(양자) 티모시 홉슨도 참석하였다.
       수년 전엔 미국 국방부 정보국의 소련 분석관 출신 크리스티나 셀턴이 쓴 ‘앨저 히스: 왜 그는 반역을 선택하였나’라는 책이 나왔다. 히스가 얄타 회담에서 한 역할이 언급되어 있다. 2차 대전 후의 세계 질서를 결정한 이 역사적 회담에서 히스는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의 보좌관으로 참여, ‘블랙 북’을 관리하였다. ‘블랙 북’은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탈린, 처칠과 논의할 주제에 대한 미국의 전략을 정리한 최고 기밀의 자료집이었다. 소련 간첩이 20세기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회담의 가장 중요한 정보를 관리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국무부의 모든 회담 준비 자료는 히스에게 전해졌다. 당시 국무부는 소련에 일본 영토 쿠릴과 사할린을 넘기는 데 반대한다는 메모를 작성했으나 루스벨트 대통령용 브리핑 자료집에선 빠져 있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국무부의 입장을 잘 알지 못하고 회담에 임해 두 지역을 終戰(종전) 뒤 소련에 양도하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히스 등 미국 내 소련 간첩망으로부터 얻은 정보로 미국 측의 얄타 회담 전략을 미리 알고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문서 보관소에서 쿠릴의 양도에 반대하는 미 국무부 문서가 발견되었다. 著者(저자)는 이 문서가 히스에 의하여 제공되었다고 썼다. 히스는 극비 문서를 루스벨트에겐 보고하지 않고, 소련에 건네주었다는 뜻이다.
     
       양식 있는 교양인 행세를 한 히스는 왜 그토록 오래 거짓말을 하였을까?

    이 의문에 대하여 미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 편집국장 출신 루이스 부덴즈는 히스가 黨(당)을 위하여 소신 있게 거짓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골수 공산주의자였던 히스의 양심은 ‘당의 이익을 위한 무한한 봉사’에 있으므로 그런 사람에게 진실은 사실이 아니라 당의 명령이란 것이다.

       한국의 從北(종북)인사들이 보여주는 행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진실된 고백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히스를 부렸던 소련군 정보기관 GRU의 문서는 공개된 적이 없다. 히스의 비밀은 몸통이 아직 密封(밀봉) 상태이다.

    한국에도 히스처럼 북한정권을 위하여 봉사한 고급간첩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는 공산주의자이다' '나는 주사파이다' '나는 빨갱이이다'라고 외고 다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감정을 받아야 할 것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