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  李光耀가 鄧小平에게 한 충고
              
      몇년 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싱가포르의 지도자 故李光耀(이광요)와 다섯 시간 인터뷰한 내용을 6페이지에 걸쳐 실었다. 싱가포르를 세계 일류의 도시국가로 만든 그는 타임 기자가 “지금까지 公的(공적)생활을 통해서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는 누구냐”고 물었다. 李씨는 “鄧小平(등소평)이다”고 말한 뒤 이렇게 설명했다. 
       
       “1978년 11월 그가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 앞에 재떨이와 가래통을 갖다놓았으나 그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鄧小平은 ‘당신은 싱가포르를 위해서 위대한 일을 했군요, 축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무슨 뜻인가요’라고 하니 鄧小平은 ‘1920년에 내가 마르세이유로 가는 길에 싱가포르에 들렀는데 그때는 형편없는 도시였지요. 이제 와서 보니 완전히 달라졌어요’라고 했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하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 남쪽에서 온 땅 없는 농민 출신이지만, 귀하는 관료와 작가들과 사상가들, 그리고 그 많은 명석한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1992년 등소평은 南巡講話(남순강화)라는 걸 했는데 이때 ‘싱가포르에서 배우자.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그때 내가 한 말을 이 분이 잊지 않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1978년에 방콕, 쿠알라룸푸르, 싱가포르를 방문한 것이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세 나라가 3류 도시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2류 도시였고 북경이나 상해보다도 나았거든요. 그가 탄 비행기의 문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는 참모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부하들이 혼나고 있을 거야. 보고를 잘못 올렸거든.’. 그가 돌아간 뒤 數週(수주)가 지나지 않아 인민일보는 더 이상 싱가포르를 미국의 走狗(주구)라고 비난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대신 싱가포르가 깨끗하고 정원도시이며 주택사정이 좋다고 보도하기 시작했어요. 노선을 바꾼 거지요. 곧 鄧小平은 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74세의 평생 공산주의자가 대장정의 동지들을 설득하여 시장경제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등소평의 개방 정책이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다. 시진핑 주석은 외환 보유고 3조 달러를 외교 무기로 삼아 미국에 도전하는 영향력을 비축하였다. 그는 흔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불린다. 푸틴처럼 분쟁 유발자도 아니고 트럼프처럼 국내 기반이 약하지도 않아 건설적 영향력 면에선 최강이란 평가이다. 등소평이 모택동을 적폐청산 대상으로 삼았더라면 오늘의 중국도, 오늘의 시진핑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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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毛澤東도 살고 鄧小平도 살게 한 역사결의
       1981년 중국공산당의 '건국 이래 黨의 약간의 역사 문제에 대한 決議'
       鄭淳台 
      
      1981년 6월27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11期6中全會)는 「建國 이래 黨의 약간의 歷史문제에 관한 決議」(이하 歷史決議로 표기함)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歷史決議는 毛澤東(모택동)이 주도한 「文化大革命」(문화대혁명)의 極左路線(극좌노선)을 부정하고, 鄧小平(등소평) 체제를 확실한 이론적 기반 위에 올려 놓으면서 오늘의 중국을 經濟 제일주의의 길로 이끈 역사적 文獻(문헌)이다. 
       
       8개 부문, 38개 항, 약 3만 字로 구성되어 있는 歷史決議의 실무적 작업은 中共黨 최고 이론가 胡喬木(호교목) 그룹이 맡았지만, 그 全文에는 20년에 걸친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鄧小平의 의지, 즉 그의 實用主義 정신이 철저하게 반영되어 있다. 鄧小平은 1980년 3월부터 1981년 6월 사이에 아홉 차례에 걸쳐 「역사결의 基礎小組」에 문건의 기초와 수정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세세한 부분에까지 간여했다. 
       
       문제는 毛澤東이었다. 中國은 毛澤東의 呪術(주술)에서 깨어나 그의 神性(신성)과 극좌 이데올로기의 과잉상태를 약화시키지 않고서는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에 있어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歷史決議가 작성되던 무렵만 하더라도 毛澤東을 비판하는 데는 아직도 勇斷(용단)이 필요했다. 
       
       毛澤東은 이미 1976년에 사망했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偶像化(우상화) 작업에 의해 여전히 중국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특한 역사적 지위를 차지한 「創業皇帝」(창업황제)였다. 鄧小平은 그의 「歷史決議의 基礎에 대한 意見」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毛澤東 동지의 오류에 대해 度가 지나치게 써서는 안 됩니다. 度를 넘게 되면 毛澤東 동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黨과 우리나라의 체면에도 먹칠을 하게 됩니다.』 
       
       鄧小平은 毛澤東을 부정하거나 기왕의 黨결의를 全面 무효화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역사를 보는 그의 균형감각이 돋보인다. 
       
       『毛澤東 동지의 功過(공과)에 대해 적절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고참 노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토지개혁 시기의 빈농, 중·하층 농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毛澤東 사상이란 깃발을 내려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 깃발을 내던지는 것은 사실상 우리 黨의 빛나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鄧小平은 『나에게도 잘못이 있었다』는 밑자락을 깔고 『毛澤東 동지가 만년에 이르러 사상에 일관성이 없고 어떤 이야기는 서로 모순되기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못박았다. 
       
       『대체로 1957년(전반기)까지 毛澤東 동지의 領導(영도)가 옳았으나 1957년 (여름의) 反右派(반우파) 투쟁 이후부터 誤謬(오류)가 점점 늘어났다.』 
       
       그 오류의 핵심인 文革에 대해 鄧小平은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문화대혁명」이 한 세대의 발전에 지장을 주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세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문화대혁명」으로 無政府主義와 극단적인 개인주의가 범람하게 되었고, 사회기풍에 심각한 害(해)를 끼쳤습니다.』 
       
       鄧小平은 「문화대혁명」 시기 중 「毛澤東 동지의 오류」와 「4인방의 도전」과 홍위병의 난동을 극복한 데 대해 중국공산당과 인민이 힘을 합쳐 「逆轉勝(역전승)한 기록」으로 평가했다. 
      
       조선일보 북경특파원을 지낸 朴勝俊 기자가 오늘 쓴 칼럼에 나오는 대목이다. 
       
       <93세에 세상을 뜬 덩샤오핑(鄧小平)은 1997년 2월19일 세상을 떠나기 나흘 전에 부인 줘린(卓琳)을 통해 유언을 남겼다. 줘린은 중국공산당 중앙판공실로 편지를 보내 “이것이 덩샤오핑 동지의 마지막 부탁”이라고 전했다. 부인이 전한 덩샤오핑의 유언은 이런 것이었다. 
       
       “유체(遺體·시신) 고별의식 같은 것은 거행하지 마라, 영당(靈堂·빈소)도 차리지 마라, 유체는 의학연구를 위해 해부용으로 제공하고, 각막은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라, 화장한 뼛가루는 바다에 뿌려라.” 
       
       중국은 전통적으로 매장(埋葬)이었으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화장(火葬)으로 통일됐다. “사고행위가 끝난 육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회주의 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베이징(北京)에서 세상을 떠나면 권력자이건 보통 인민들이건 예외없이 베이징 장안가 서쪽에 있는 팔보산(八寶山)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거기에 있는 공묘(公廟)에 안장된다. 덩샤오핑의 유골은 유언에 따라 비행기에 실려 동중국해에 뿌려졌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