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밖으로 달려 나와 나는 가장 구석진 곳에 숨었다. 혹시나 공안이 가고 나면 초린이를 만나고 싶어서였다. 설사 붙잡혀 북한으로 다시 끌려가도 감사하단 인사와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파트 현관이 보이는 어둠 속에 숨어 지켜보았다. 숨을 겨우 진정할 때쯤 사이렌을 울리며 공안 차가 왔다. 뒤이어 두 대가 다시 들이닥치며 모두 8명이 내렸다. 4명은 올라가고 나머지는 나를 찾으려는지 흩어졌다.

    그들 중 한 명이 날 발견할 수 있는 곳까지 접근할 때 나는 슬그머니 일어서 처음엔 걷는 척하다가 이어 냅다 뛰었다. 아마 십 분 넘게 달린 것 같았다. 공안이 따라 붙지 않았다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했을 때에야 허리를 숙이고 토하듯 기침하며 가슴을 두드렸다.

    그 밤은 몹시 추웠다. 연길에선 어떻게 산에서도 이틀이나 잤을까. 얼어 죽지 않았을까. 초린이 덕에 호강했던 며칠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사무치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보고 싶었고, 도망칠 때 뒤에서 울렸던 쿵 소리가 공안이 문을 막고 있던 초린이를 밀어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넘어지며 머리가 깨진 것은 아닌지 그가 불쌍해서 울고 싶었다.

    나는 내가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닫고 온 길을 더듬어 되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초린이 삼촌 집에서 외출 첫 날 당한 일이라, 그리고 친구랑 함께 뛰었다면 약속대로 골목마다 오른쪽으로 돌아섰겠지만 너무 여념 없었기 때문에 좀처럼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창문에서 내려다 본 기억으로는 기차역과 여러 선의 레일들이 뻗은 곳이어서 나는 그 근처에서 온 밤 헤매었다. 내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 한참 후였다. 그러나 나는 허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웃음이 났다. 초린이가 맛있다며 손뼉 치던 음식들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날 밤 장춘에서와 마찬가지로 PC방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시집 노트와 신분증이 있는 곳을 만져보니 그대로였다. 가진 것이 많았다면 몰랐겠지만 그때에는 내 재산이 그게 전부여서 겨울옷은 주머니가 많아서 더 따뜻하게 여겨졌다. 초린이 삼촌 집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어둠 속에서 미처 못 봤던 건물들이 난잡해서인지 밝은 낮이 도리어 더 캄캄했다. 초린이가 표를 주었던 찜질방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 앞에서 가다려 보련만…

    택시타고 움직였기 때문에 도통 알 재간이 없었다. 나는 목숨을 건 이 먼 탈출에서 좀 더 세심하고 치밀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 심각하게 반성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방법을 고심했다. 문득 광용이 생각이 났다. 전화를 걸군 했으니 그의 핸드폰에 삼촌 집 번호가 남아있으리라. 그래서 전화를 하면 초린은 기필코 다시 달려 나오리라. 그것이 안 된다면 그동안 고맙다고 인사라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화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나는 돈! 이 생각에 기운이 빠졌다. 광용에게 전화하고 다시 초린이 삼촌 집으로 연결하자면 최소 1원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나는 혹시나 떨어진 돈이라도 없을까. 본능적으로 보도블럭을 유심히 살폈다. 땅만 보며 30분 걸었는데도 땡전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초린이가 언젠가 이야기해줬던 서탑교회가 기억이 났다. 탈북자들이 거기 가서 동냥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돈을 많이 준다는 것이었다. 어떤 탈북자는 그 돈을 모아 여권을 사서 편안히 갔다고도 했다. 하여 머리를 쳐들고 십자가가 솟아있는 그 하늘을 찾았다. 인생을 통째로 맡기는 구걸이 아니라 인간 對 인간으로서 전화비 1원만 부탁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것은 절대 동냥으로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보이는 것은 부와 번영을 다투어 자랑하는 건물들과 고객을 부르는 광고 간판들뿐이었다. 그 속에 경회루라는 한글 간판이 보였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점심 식사 전이라 청소하는 아줌마만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했더니 아직 식사시간 전이라고 말해 나는 얼른 서탑교회를 물었다. 그가 그려준 약도와 설명대로 15분 쯤 걸어서 찾아갔더니 마침 한 무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현재 크리스챤이다. 주말마다 강남교회에서 기도하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아마 예배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 그들이 흘리는 한국말이 나는 얼마나 반가웠던지 모른다. 내가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내 민족, 대한민국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패션도 남달랐다. 옷감 재질이나 디자인도 중국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생머리 여자와 머리를 밤색으로 염색한 젊은 남자가 내 옆을 지나칠 땐 북한에서 보았던 '가을동화' 드라마 주인공들 같기도 했다. 뿌듯했다. 나의 민족이 보기 좋아서 더 자랑스러웠다. 나는 이미 그들 속에 평등하게 서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1원쯤은, 이런 생각으로 왔지만 1전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마치도 내가 아니라 내 아버지가 손 내미는 것 같고 내 어머니가 구걸하는 것 같아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차라리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아 문을 열려는데 지키고 있던 사람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목사 좀 만나려고 합니다. 꼭 말씀 드릴게 있어서 그럽니다." 내 억양에서 북한 사람임을 금방 안 그 사람이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죄송한데 목사님은 예배를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요일에 오세요, 그때 돈 줄게요, 지금은 안 돼요." 난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난 돈 구걸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돈 때문에 오지 않았습니다. 한국 가려고 왔다구요." "여기 탈북자들 오는 곳이 아닙니다. 영사관이나 대사관으로 찾아가세요, 탈북자들이 여기 자주 오기 때문에 공안도 근처에 많아요, 안 잡히겠으면 빨리 가세요."

    서탑교회를 빠져나와 공안을 뒤로 의식하며 걸음을 다그치는 나의 가슴 속에선 울분이 치솟았다.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에는 '우리 말'이란 시가 있다. 남의 말에 억눌리며 살려 달라 애원하는 그 우리 말이 '남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의 국어라고 생각해보시라'고 호소하는 시가 바로 그때 심경을 그대로 옮긴 시다. 나는 정말 그때만큼 대한민국이 미워본 적 없었다. 내 짚는 걸음마다 연길시장 끝에서 외치던 친구의 절규도 들렸다.

    "우린 한국 못 가, 너무 사정을 모르고 왔어, 한국 사람만 만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니잖아! 우린 지금 꽃제비야, 이러다 잡힐 건 뻔해. 잡히면 너나 나나 살 수 있을 것 같아? 3대멸족이라고! 그래서 잡힐 바엔 차라리 죽으려고 샀다! 왜?"

    심장이 울렁거렸다. 친구가 선택했던 칼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지금 깨닫는 것을 친구는 그때 먼저 안 것일지도 모른다. 공원의 차디 찬 벤치에 앉아 갈 곳 없는 운명을 생각하니 만약 공안과 마주서면 어떻게 할까. 이런 마지막 상황을 그려보게 되었다. 만약 칼이라도 있었으면…혹시나 하는 마음에 윗 주머니를 더듬는데 무엇이 잡혔다. 손을 넣어보니 종이였다. 꺼내어 집어 던진 그 종이를 보던 나는 벌떡 몸을 솟구쳤다. 돈이 아닌가. 그것도 1원짜리 두 장이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아니 어제 밤 택시에서 내릴 때 초린이가 기어이 챙겨 넣어준 거스름돈, 그 2원이었다.

    "초린아!" 나는 그 이름을 부르며 달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주먹으로 씻고 나면 또 흐려져 앞을 가렸다. 마침내 전화를 밖에 내 놓고 통화 장사를 하는 아줌마에게 나는 돈을 던지다시피 하고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그 다음 광용의 목소리를 기다리며 초린의 얼굴을 생김 그대로 기억해내려 했다.

     "여보세요"  "나예요, 내 말 좀 들어주세요" 광용의 목소리가 들리기 바쁘게 통화시간을 단축할 일념으로, 그래야 초린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오직 그 한 생각으로 빠르게 말했다. "돈이 없어 그러니 핸드폰을 이제 곧 닫고 내가 계속 통화를 했던 집 번호, 그 번호를 알려줘요, 내가 다시 금방 전화하겠으니깐,"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요?" 

    다시 설명하려고 하는데 광용의 다음 말이 내 입을 막았다. "친구가 죽었어요" "뭐?" "당신 친구가 죽었다구요" "무슨 말이야! 똑바로 설명해 이 자식아!" 고함치는 내 입도, 들고 있는 수화기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정해요. 일단 진정하고 듣기만 해요, 창용아저씨가 공안에 갔을 땐 친구 사진만 보여주더래요, 모른다고 하니깐 그냥 협박만 하다가 돌려보내더래요. 근데 어제 친구 작은 삼촌이라는 사람한데서 전화가 왔었어요. 친구가 당신이랑 헤어지고 나서 연길에 왔을 때 내가 말했잖아요, 친구 작은 삼촌을 찾았다고, 그때 내 전화번호를 주었었는데 어제 밤 전화가 왔었어요, 그래서 나갔더니 조카가 죽었다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막 울어요. 공안에 붙잡혀 가던 도중 오줌 싸게 해달라고 차를 세워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대요."

    나는 그 뒤의 광용이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죽었다. 그 말은 내 친구와 이어질 수 있는 말이 아니어서 그냥 서있기만 했다. 설사 친구의 삼촌이 한 말이라도 절대 가능할 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친구가 어떻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틀리는 말 일거야, 아니 오해일거야, 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오열에 울지 말자. 울지 말자 스스로 타이르며 걸었다. 그러다 걸음을 뚝 멈춘 그 자리서 나는 주저앉고 말았다. 친구가 그렇게 사정했는데도 사주지 않았던 술 생각이 나서였다. 잠시나마 한국행을 포기할지라도, 그래서 잠시나마 함께 나약해질지라도 그때 술 한 병 사서 먹었을 걸, 그러면 오히려 더 분발했을 걸…

    공안과 북한 보위부의 끈질긴 추격에 피가 타는 삶의 순간을 단 한 번 적셔보려 했을 뿐인데도 그 소원마저 이르지 못한 친구의 곡절에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 더 안타까웠던 것은 나에겐 돈 한 푼도 없었다. 그래서 위안으로나마 친구의 마지막을 기원하고 두 손 모아 빌어 줄 술 한 잔도 없었다!. 술 한 잔도 없었다!. 술 한 잔도 없었다!

    나는 자주 지인들에게 그 친구와 탈북과정을 이야기해주군 했다. 그러면 한결같이 글로 남기라고 했다. 하지만 탈북 후 5년 동안 친구의 마지막 운명을 부정하고 살았던 나였다. 혹시 글로 옮기면 지금도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친구의 탈북을 방해할 것만 같은 미련 때문이었다. 내가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두 달 반을 머무르고 있던 마지막 날들에도 내 얼굴을 알아본 청진과 무산에서 온 탈북자가 6명이나 되었다. 그때도 그들은 광용의 말과는 다르게 친구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리가 탈북 후 뒤늦은 조치인지 평성과 청진 등 전국 곳곳에 친구와 내 수배사진이 걸렸었다고 했다. 평양시 중앙기관 사람들의 탈북인 데다 친구 가문이 워낙 유명하여 사람들 속에서 소문이 자자했다는 것이다. 며칠 후 동인민반 회의에서 '배신자의 말로'라는 강연을 했는데 그 사례들 중 우리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 그 6명도 이 수기를 보고 있다면 영사관에서 친구의 죽음을 결단코 부정하던 고집스런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의 이름을 알고 있는 평양에서 온 고위탈북자가 친구의 자살을 확인해주었고, 그 날부터 나는 매일매일 이 수기를 쓰게 되었다. 이 저녁에도 나는 친구가 마지막을 결심할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어질고 착한 그가 어떻게 몸이 부서지는 그 벼랑 밑으로 뛰어내릴 용단을 했을까. 하고 눈물 흘리게 된다.

    북한은 중국 공안에 그를 살인자라고 신고했다. 남을 살해한 도피자는 절대로 자살하지 않는다. 자유의 선택을 살인으로 규정한 김정일 독재가 살해했고. 북한의 악법인 3대멸족이 살해했다. 내 친구는 이렇게 나이 30에 죽었다. 창용아저씨가 비밀로 해달라던 그 700달러를 가슴에 품은 채, 대한민국에 오지 못한 한을 심장에 묻은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