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격랑속으로 ⑦

     정문을 나온 나는 담장 옆에 서있는 두 사내를 보았다.
    이시다 주우로와 통역 기석이다.
    이시다가 기석을 통해 나를 불러낸 것이다.

    다가선 내 기색을 살핀 이시다가 물었다.
    「이공, 어젯밤 사건을 들으셨는지?」
    내가 머리만 끄덕였더니 이시다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길게 숨을 뱉는다.
    「과격한 군부의 소행이요, 양국의 우의를 깨뜨리게 될까 걱정이오.」

    어금니를 물었던 내가 발을 떼어 옆쪽의 나무 그늘 밑으로 다가가 섰다.
    이시다가 잠자코 따라와 나를 마주보았다.
    오늘 이시다는 두루마기에 맨머리 차림이다.
    개화한 조선인처럼 보인다.

    내가 입을 열었다.
    「조선 민심을 살피는 것이 귀공의 임무일테니 내 생각을 말해주리다.」
    이시다가 퍼뜩 시선을 들었지만 곧 입가에 웃음을 띄운다. 그리고는 잠자코 나를 보았다.

    「내가 아직 세상 물정은 모르나
    지금 조선 땅에 들어와 횡행하는 모든 나라가
    제각기 제 잇속을 첫째로 챙긴다는 것쯤은 아오.」
    이시다가 나같은 백면서생을 무엇 때문에 찾겠는가?
    조선의 민심을 알려는 것이다.

    미곡상이라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군부의 끄나풀이렸다.
    내가 물정에 어둡긴 하나 이시다를 두 번째 만났을때부터 저의(底意)를 간파하고 있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이제 국모가 제 영토의 궁궐에서 타국의 병사에게 시해 당하고 시체를 불에 태우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런 치욕이 없소. 허나 어찌하겠소?」
    목소리가 떨렸으므로 나는 헛기침을 했다.

    학당에 다니면서 개화된 미국 문명뿐만 아니라 미국식 민주주의 정치 방식에 감동하면서 조선 땅에도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를 자주 궁리는 해보았다.
    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로 급격히 발전한 일본식 체제를 동경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번 국모 시해 사건은 나에게 현실의 참담함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

    일본도, 미국도, 이미 축출된 청국도, 그리고 새로 강자로 등장한 러시아도, 모두 같다.
    제놈들 잇속이 우선인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요동반도를 집어 삼켰을 때 세계 질서를 세운답시고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이 압력을 넣어 토해내도록 한 것이 그 증거다.
    이제 종이호랑이가 된 대청(大淸)도 열강의 식탁에 놓인 고깃덩이일 뿐인데 조선 땅은 오죽 하겠는가? 내가 말을 이었다.

    「우리 조선 땅은 백제, 신라, 고구려, 고려 왕조에 이어져 내려오는 동안 수십번의 외세 침탈을 겪었어도 곧 회복되었고 다시 번성했소. 나는 조선 백성이 오늘을 딛고 내일의 번영을 이루리라고 믿소.」
    「과연.」
    머리를 끄덕인 이시다가 굳어진 얼굴을 풀고 말했다.
    「주모자는 죄를 받을 것입니다. 나는 이공과의 인연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아니오.」
    쓴웃음을 지은 내가 머리를 저었다.
    「내 친우로 일본당과 친한 사람도 여럿 있지만 나는 앞으로 그 어느 쪽에도 깊게 간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시다가 긴장했고 나는 똑바로 시선을 주었다.

    한때 이시다를 역이용하여 그쪽 물정을 더 알고 싶기도 했다.
    이제 청일전쟁에서도 승리한데다 일본을 견제하던 국모까지 시해했으니 일본 세력이 더 기승을 부리리라. 내가 말을 이었다.

    「이시다공께서도 나를 찾는 일을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절연 선언이나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