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⑰  

     내가 다시 미국 본토 땅을 밟은 것도 1919년 1월 15일이었으니 만 5년만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담에 약소국(弱小國)동맹회의 조선국 대표로 국민회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상해의 신한청년단에서도 대표로 김규식이 선출되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윤해, 공정일 등이 뽑혀 파리로 떠난다니 조선 대표는 여럿이 되겠다.

    「윌슨 대통령을 만나 보시지요.」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국민회중앙총회의 간부 임정훈이 내 숙소로 찾아와 말했다.

    임정훈은 이번에 나하고 같이 대표로 뽑힌 정한경과 함께 왔다.
    「동포들의 기대가 아주 큽니다. 박사님.」

    윌슨 대통령은 작년인 1918년 1월 8일 년두교서에서 14개항의 교서를 발표했고 그 중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었다. 독일은 며칠 후인 1월 11일에 항복을 했는데 약소국은 윌슨이 발표에 희망을 품었다.

    민족자결주의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제국주의 국가의 팽창을 저지하고 힘의 논리로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또한 약소민족의 독립 및 복귀에 자결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으로 각 민족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 할 권리가 있다는 내용이다.

    그 교서가 발표된 후에 교민들, 그중에도 멀리 떨어진 조선 땅의 애국지사들은 기대감으로 부풀었다.
    윌슨이 조선의 상황을 콕 집어서 말해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윌슨과 친분이 있다고 미국 사회에까지 소문이 나있는 나에게 국민회 간부인 임정훈까지 직접 만나보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문득 내가 하와이로 떠나기 전에 워싱턴에서 만났던 웨스트만을 떠올렸다. 윌슨이 보낸 개인 보좌관 웨스트만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대통령께서는 인연을 얼마든지 강조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던가?
    「물론 문서로는 보장시켜드리지 못합니다.」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내가 임정훈을 보았다. 지금 윌슨은 재선에 성공하여 6년째 대통령직을 맡고 있다.

    「어차피 뉴욕을 거쳐 파리로 갈테니 백악관에 연락을 해 보지요.」
    나는 가라앉아있는 내 목소리를 들었다.

    우드로 윌슨은 자신과의 인연을 나에게 상품으로 내주었다.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그랬지 않겠는가? 또 떠돌이 방랑자가 불쌍했는지도 모른다.

    임정훈이 떠나고 정한경과 둘이 남았을 때 정한경이 말했다.
    「여권 발급 문제가 있습니다.」
    내 시선을 받은 정한경이 말을 잇는다.
    「일본 영사관에서 이미 우리 목적을 파악하고 있을 것입니다. 출국 허가를 내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우리는 일본 국민이 되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서양을 건너 파리로 가려면 일본 영사관에 가서 출국 허가증을 받아야만 한다.

    「뉴욕으로 가서 해결합시다.」
    내가 말하자 정한경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요.」

    그리고는 정한경이 쓴웃음을 짓는다.
    「교민들은 당장에 조선이 일본의 압제에서 풀려날 것으로 믿는 것 같습니다.」

    교민 대부분은 순수하다. 국민회 지도부는 정치권의 내막을 아는 터라 감동은 적은 편이다. 나 또한 윌슨의 14개 교서를 샅샅이 정독했지만 미국의 정책이 특별히 조선국에 이롭게 변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민 그리고 조선 땅의 동포들의 여망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장을 꾸려 다시 동부로 떠났다. 미국 동부를 떠올리면 언제나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 가난했던 학창시절. 그리고 태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