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⑱  

     3·1운동이 일어났다.
    조국 동포들이, 그것도 압제 하에서. 그 소식을 들은 순간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박용만이다.
    박용만의 무장군단. 잘 훈련된 군단이 돌진하는 장면이다. 나는 뉴욕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데 3월 10일쯤 되었다.

    「수십만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답니다.」
    교민 하나는 그렇게 말해주었고 방금 경성에서 전보를 받았다는 어떤 이는,
    「평양이 독립군에게 함락되었답니다.」
    해서 모인 교민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거리로 뛰어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며칠 지났더니 점점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윤곽이 드러났다.
    3·1 독립선언을 발표한 33인의 명단도 나왔다.

    「장하다.」
    혼잣소리처럼 내가 말했더니 앞에 앉아있던 윤기술이 길게 숨을 뱉는다.
    「같이 죽었어야 하는데요.」

    이제 차츰 조선 땅의 실상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군경은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벌여 수천명이 처형당했고 수만명이 갇혔다고 했다.

    머리를 든 윤기술이 말을 이었다.
    「우리도 다시 이곳에서 일본놈을 죽여야겠습니다.」

    윤기술은 40대 중반으로 노동자 이민 10년차였는데 뉴욕에서 청과상으로 성공했다. 5년 전에 사진으로 결혼한 부인과 뒤늦게 결혼하여 세 살짜리 딸이 있다.

    그때 내 옆으로 호텔 직원이 다가왔다.
    「미스터 리, 손님이 오셨습니다.」

    머리를 든 나는 다가오는 장신의 백인을 보았다. 낯이 익다. 윌슨의 개인 보좌관 웨스트만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내가 웨스트만을 맞았다.

    「어서오십시오. 웨스트만씨.」
    「반갑습니다. 이박사님.」

    웨스트만과 호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윤기술을 소개한 내가 셋이 자리에 앉았을 때 웨스트만이 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튜멀티 비서실장이 내일 오후 3시에 뵙자고 합니다.」
    머리만 끄덕인 나에게 웨스트만이 말을 잇는다.
    「이박사 혼자만 오시는 것이 낫겠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내가 웨스트만을 향해 머리를 숙여 보였다.

    튜멀티(Joseph Tumulty)는 백악관 비서실장인 것이다. 지난번에 잠깐 만났고 이번이 두 번째다.
    나는 여권발급이 되지 못해서 파리에 가지 못한 대신으로 윌슨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해놓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나는 정한경과 함께 작성한 「조선국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에 대한 건의서를 윌슨에게 건네 줄 예정이다. 물론 국민회 총회장 안창호의 승인도 받았다.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의해 일단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도록 해야 된다는 것에 국민회 지도부도 공감하고 있다.

    웨스트만이 떠나자 윤기술이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대통령을 만나는 겁니까?」
    「글세, 모르겠소.」

    윤기술은 국민회 뉴욕 교민회장이다. 오늘 내가 웨스트만과 대화한 내용이 내일 아침이면 미국 동부지역에 다 퍼지게 될 것이다. 윌슨이 자신과의 인연을 강조해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겨우 이렇게 사용한다. 이것이 내 권위보다 교민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윤기술과 함께 웨스트만을 기다린 것이다. 

    「대통령을 만나시거든 조선 교민들이 모두 지지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윤기술이 다시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