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⑳  

     5년만에 찾아온 태산의 묘는 잡초에 덮여졌고 묘비는 검게 풍상으로 그을려져 있다.
    이곳은 필라델피아 근교의 론뷰(Launview) 공동묘지.

    태산이 묻힌 지 13년이 되었다. 묘비에 써진 태산아(THISANAH) 그리고 (1899-1906)의 짧은 글이 짧은 생애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져온 장미꽃을 묘비 앞에 놓고는 저고리를 벗어두고 잡초를 뽑았다.

    1919년 4월 중순, 오후의 햇살이 환하게 비치고 있다.

    「태산아, 네가 살았으면 올해로 21살이 되었구나.」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내가 태산에게 말했다.

    묘지는 한적하다. 멀리 노인 한 쌍이 묘비 앞에 서 있을 뿐이다.

    「태산아, 애비 나이도 이제 마흔다섯이 되었단다.」
    다시 말했던 나는 갑자기 목이 메이는 바람에 허리를 펴고 섰다.

    고국에서는 3·1 만세가 일어나 아직도 뒤숭숭하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33인은 모두 체포되었지만 마른 숲에 불길 일어나듯 동포들은 만세를 부르고 있다. 만세! 만세! 그러나 손에는 태극기를 쥐었을 뿐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박용만이 발을 구르며 통곡을 했다고 들었다.
    아아, 착한 조선 백성들이여! 만세를 부르다 총에 맞고 칼에 맞고 다 죽어가는구나.

    「내가 지금까지 뭘 했는지 모르겠다.」
    묘비를 향해 소리치듯 말한 순간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방랑할 것인가? 차라리 고국에 돌아가 만세라도 불러야 되는 것이 아닌가?
    「민족자결주의」는 오직 강대국의 전술일 뿐이다. 약소국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제 힘으로 찾아야만 한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나는 몸을 돌렸다.
    「이박사님!」

    조선말이다. 그리고 사내 둘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필라델피아 국민회 회장 김병구와 총무 양태식이다.

    「이박사님!」
    내가 보고 있는데도 김병구가 다시 목청껏 부르면서 달려온다.

    그 순간 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고국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일본군 놈들이 또 얼마나 죽였는가?

    그때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김병구와 양태식이 내 앞에 섰다.
    「박사님! 경성에서.」
    말을 멈춘 김병구가 숨을 고르는 동안 숨이 덜 가쁜 양태식이 새 새끼처럼 입만 짝짝 벌렸다가 닫는다. 대신 말하고 싶지만 참는 것이다.

    그때 김병구가 소리치듯 말했다.
    「경성에서 조직한 임시정부에서 박사님을 국무총리로 임명했습니다.」
    나는 눈만 껌벅였고 이번에는 양태식이 말을 잇는다.
    「저기, 만주의 임시정부에서도 박사님을 국무경으로 임명했다는 전보가 왔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손까지 저으며 김병구가 나섰다.
    「상해 임정에서 박사님을 국무총리로 임명했습니다. 내무총장에 안창호, 법부총장에 이시영...」
    「잠깐만.」

    손을 들어 말을 막은 내가 길게 숨부터 뱉고 나서 물었다.
    「전보가 어디서 왔습니까?」
    「우리 국민회로 쏟아지듯 오고 있다는 겁니다. 모두 박사님을 찾고 있습니다!」
    김병구가 말하자 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3·1 만세를 기점으로 세계 각국에 흩어진 조선독립단체들이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양기택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박사님을 국무총리, 대통령으로 추대한 단체만 6개나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