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24)

     내가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 호놀루루항에 도착했을 때는 1920년 6월 29일이다.
    이때는 이미 대한민국의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비공식이나마 인정을 받고 있었던 터라 미국 경찰의 경호를 받았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 이후로 1년여가 지난 것이다. 그동안 나는 워싱턴의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벌였지만 큰 성과는 이루지 못했다.

    나와 동행한 구미위원부장 김규식이 환영하는 교민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조국에 온 것 같습니다.」

    김규식은 구미위원부장을 사임하고 나와 함께 상해로 갈 예정이다.

    「이보게, 우사(尤史). 나도 그렇다네.」
    쓴웃음을 지은 내가 김규식을 보았다.

    우리 둘은 무개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거리를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앞쪽 차에는 교민 대표들이 탔고 그 앞에는 경찰차가 선도하고 있다. 일년반 전에 하와이를 떠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장면이다.

    내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고집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수 있었겠나?」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각하.」
    「가다가 죽더라도 가야지.」
    「생전에 꼭 조선 땅의 독립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덕담은 수도 없이 듣고 말해왔다. 주문처럼, 때로는 버릇처럼 뱉어왔기 때문에 이젠 감동도 없다.

    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식민지가 된지 이제 10년, 강산이 변했건만 조국에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날이 꼭 오겠지요.」

    화창한 날씨, 연도에서 손을 흔드는 교민들과는 대조적으로 우리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김규식(金奎植)은 1881년생이니 나보다 여섯 살 연하다. 그러나 언더우드 목사의 양자가 되어 1903년에 로노크대를 졸업하고 1904년에는 프린스턴대에서 석사를 받았으니 나보다 일찍 미국 교육을 받았다.

    1905년에 귀국하여 경신학교 교감, 연회전문 교수를 역임한 후에 1913년에 중국으로 망명을 했다. 1918년에 모스크바 약소민족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은 1919년의 상해 임정에서 외무총장, 파리 강화회의 전권대사를 맡다가 내 요청으로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역임하고 상해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우리가 투숙한 교외의 2층 저택은 교민 이우성의 별장으로 주변 경관이 훌륭했다. 뒤쪽은 푸른 바다여서 가슴이 탁 트였다.

    베란다에 나와 앉았을 때 이번에 함께 온 임병직이 다가와 말했다.
    「일본 총영사관에서 보낸 첩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임병직이 손을 들어 옆쪽을 가리켰다. 시내로 통하는 길가에 서너대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다.

    「저게 모두 일본놈 정보원들이 타고 온 차라고 합니다.」

    일본총영사관은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을 것이었다. 이것도 일년반 전과는 다른 장면이다.

    그때 이우성이 베란다로 나왔다. 40대 후반의 이우성은 이민 17년째가 되었는데 어선을 세척이나 소유한 선주다.

    나에게 다가온 이우성이 정색하고 말했다.
    「각하, 당분간은 제 집에서 머무시지요. 보드윅씨가 아직 배 준비가 덜 되었다고 합니다.」

    보드윅(William Borthwick)은 내 친구인 장의사로 이번에 상해 행 배 편을 마련해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여권과 비자가 없는 터라 상해 행은 밀항을 해야만 한다.

    더욱이 일본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인 나에게 현상금 30만불을 걸어놓았다고 한다. 30만불이면 3대가 써도 남을 거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