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29)

     도산 안창호는 상해 임정이 성립된 후부터 국내 외의 임정을 통합 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한 상해 임정으로 단일화 된 후에는 내부 조직을 강화시켰으며 임정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열성을 쏟았다. 임정 창립공신이나 같다.

    이동휘가 공산당 그룹과 임정을 떠난 후의 어느 날, 나는 내 방으로 안창호를 불러들였다.
    5월 초순쯤 되었던 것 같다. 그때는 이동휘의 배후 조종으로 상해 임정을 무력화 시키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국민회의를 소집하자는 것이었다.

    상해 임정은 국민의 대의가 반영되지 않은 조직이므로 다시 국민회의를 열어 새로운 지도체제를 형성해야 된다는 것이다.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내가 안창호에게 물었다.
    「만일 도산이 내 위치에 계셨다면 어찌 하셨겠소?」
    불쑥 물었지만 안창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국민회비가 구미위원부 재정에 귀속되어야겠지요. 다만,」

    정색한 안창호가 말을 이었다.
    「국민회와 구미위원부의 갈등은 없도록 조치했을 것입니다.」
    「국민회총회장인 도산이 대통령이 되셨다면 잘 풀릴 일이었습니다.」

    나도 정색하고 말했더니 안창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임정 내외에서 저와 우남간의 권력 다툼이 있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돕니다. 알고 계시지요?」
    「당연한 일이지요.」
    길게 숨을 뱉은 내가 안창호를 보았다.

    나는 완전한 인간은 없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또 한가지 믿음이 있다.
    인간에게는 꼭 필요한 용도가 있다는 것이다. 전시(戰時)에 필요한 인간이 있는가 하면 평화시에 필요한 인재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뒤바뀌면 그 인재가 악재(惡才)로 변한다.

    지금 현 상황에서 누가 악재가 되어 있는가는 훗날 판단이 되리라.
    허나 내가 국민회의 자금원을 단호하게 단절시키고 결국 주자금원인 하와이지역을 미본토중앙총회로부터 분리시켜 놓은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적당히 타협했다면 이런 소문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시선을 받은 안창호가 물었다.
    「각하, 무슨 일이십니까?」
    「국무총리를 맡아 임정을 이끌어 주시오.」
    내가 말했더니 안창호는 시선만 준 채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내가 말을 이었다.
    「내가 임정을 맡을 역량이 안되는 것 같습니다. 도산께서 맡는 것이 내부 화합과 국위 선양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안됩니다.」

    머리부터 저은 안창호가 똑바로 나를 보았다.
    「성재(誠齋)는 상해 임정에 국민의 중지가 모이지 않았다지만 통합되기 전의 모든 임정에서 우남을 대통령, 총리, 집정관 총재, 부도령으로 선출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국민의 중지가 표출된 것입니다.」
    「허나 나는 이 난국을 극복해나갈 역량이 부족합니다.」

    내가 말했더니 안창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각하, 그 누구도 이 혼란을 중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내 에너지를 이곳에서 부대끼며 낭비하기가 싫소.」
    마침내 정색한 내가 안창호에게 말했다.
    「도산이 맡아 임정을 이끌어주시오.」

    내 시선을 받은 안창호가 한동안 몸을 굳히고만 있더니 이윽고 머리를 저었다.
    「제가 각하를 몰아냈다는 비난을 받을 겁니다. 각하께서 이곳을 떠나시겠다면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지요.」

    안창호는 결국 국무총리를 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