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홉 번째 Lucy 이야기 ②  

     나는 우연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다 연관이 있으며 노력한 만큼의 댓가를 받는다고 믿어왔고 실제로도 겪었다.

    그래서 그날 오후에 김태수가 갑자기 찾아왔을 때도 이번 자서전 때문인 것으로 금방 짐작을 했다. 지난번에 테드는 5장까지의 자서전 복사본을 가져간 것이다.

    나는 호텔 커피숍에서 테드와 둘이 마주 앉았다.
    오후 3시. 고지훈은 같이 점심을 먹고 돌아갔지만 옆에 있었다면 같이 나왔을 것이다.

    난 누구한테 구애받기 싫고 부담 주기도 싫다. 좋고 싫고가 분명한 것이 편하다.
    왜? 무엇 때문에 감춘단 말인가?

    나와 시선을 마주친 테드가 빙긋 웃었다. 편한 웃음이다. 종업원에게 커피를 시킨 테드가 입을 열었다.
    「자서전, 다 읽었어.」

    머리만 끄덕인 나를 향해 테드는 말을 잇는다.
    「내 증조부, 그러니까 김재석씨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어. 어떤 때는 갑자기 소름이 돋아나더라니까.」

    눈을 크게 떠보인 김태수가 이제는 정색했다.
    「내 피에 김재석의 유전자가 섞여 있을거야. 그건 분명해.」
    「당연하지.」
    내가 조심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테드하고는 셀 수도 없이 몸을 섞었고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래서 이렇게 서론을 끌어가다가 갑자기 튀는 수가 있다는 것도 안다.

    그때 테드가 말을 잇는다.
    「하지만 이승만은 독재자였고 독선적인데다 미제국주의를 등에 업은 분단주의자, 분단의 원흉이야.」
    「......」
    「이승만 때문에 남북한이 분리된 채 60년이 지났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
    「이승만은 김구나 김규식에게 남북한 통일 문제를 맡기고 물러났다면 지금 한반도는 통일이 되어 있었을 거야.」

    그러더니 김태수가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보았다.
    「루시, 네 조상이 누구라고 했지?」

    나는 스티브가 찾아 낸 내 선조를 떠올렸다. 내 어머니 이신옥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 즉 외할머니는 박수정. 박수정은 의병장이며 만주 벌판으로 옮겨간 독립군 대장 박무익의 손녀가 된다. 즉 내 어머니의 외증조부가 박무익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증조부는 이승만과 함께 미국 땅을 밟은 한성감옥서 소장 이중진의 동생 이중혁이다.

    가늘게 숨을 뱉은 내가 테드를 보았다. 테드는 오전에 만난 노경수 형제와는 정반대의 사연이다. 그러나 테드에게 화가 나거나 실망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테드의 시선을 받은 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도 너하고 비슷한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 테드.」
    「하지만 이승만의 자서전이 너한테 보내진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아직 다 읽지 않았어.」
    「언제까지 읽었는데?」
    「이승만이 상해 임정에서 나올 때까지. 그러니까 1921년까지.」
    「그때까지는 유명한 인물이었지. 조선 민중의 희망이었고.」
    「그만.」

    손바닥을 펴 보인 내가 웃음 띤 얼굴로 테드를 보았다.
    「여기서 좀 기다려. 내가 8장까지 복사해서 줄테니까 같이 읽자구.」
    「아, 그래?」

    테드가 거절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나는 서둘러 일어섰다. 그러면서 문득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