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①  

     하와이로 돌아온 나는 교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가슴이 뚫린 것 같은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6개월간의 상해 임정 생활은 내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었다. 내 무능과 한계를 깨닫게 되었으며 지도자급 인사들의 진면목을 알수있는 계기도 되었다. 특히 내가 경원시했던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조직이 모여서 국가도 되는 것이다.

    「태평양 군축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오.」
    내가 하와이 교민단장 민찬호에게 말했다. 민찬호는 하와이 한인학교 교장으로 나를 따른다.

    「아니, 또 가시려구요?」
    놀란 듯 민찬호가 눈을 크게 떴지만 곧 쓴웃음을 짓는다.
    「미국과 일본은 지금 밀월시대인데 통할 수 있을까요?」

    민찬호처럼 국제정세를 아는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일반 교민들, 조국의 동포들은 다르다.

    태평양 군축회의란 미국 국무장관 찰스 에반즈 휴즈가 제안한 태평양에 이해관계가 있는 9개국의 해군군비축소회의를 말한다. 1921년 10월부터 워싱턴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전권대사로 나설거요.」
    소파에 등을 붙이고 앉은 내가 정색하고 민찬호를 보았다.
    「그들이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그러나 재작년의 파리 강화회담에는 여권도 발급받지 못해서 가지도 못했다.

    「그런데 각하.」
    민찬호가 조심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각하께서 상해 임정을 버리고 도망쳐 나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런가?」
    저절로 쓴웃음이 떠오른 내가 물었다.
    「왜 도망쳤다고 합니까?」

    「능력이 닿지 않으니까 내분 핑계를 대고 하와이로 도망쳐 나왔다고 합니다.」
    「맞는 말이군.」

    정색한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고 하시오. 난 임정을 관리할 능력이 부족했소.」
    「각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민찬호가 눈을 치켜떴을 때 부인이 방으로 들어섰다.
    「식사하세요.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후 6시 반쯤 되었다. 나는 민찬호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폐를 끼치고 있다.

    우리가 식당으로 들어섰더니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일어나 맞는다. 교민회 간부 서너명은 모두 아는 얼굴이었지만 여자는 초면이다. 내 자리는 또 여자의 옆쪽으로 만들어 놓았다.

    목례를 한 내가 자리에 앉았을 때 민찬호가 여자를 소개했다.
    「각하, 안명희씨는 이번에 하와이 교민회 부녀회장이 되었습니다. 인사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머리를 숙였으므로 나는 반갑게 맞았다. 갸름한 얼굴의 미인이다.
    「반갑소. 잘 부탁합니다.」

    30대쯤의 안명희는 기품이 풍겼으며 수줍음을 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민찬호가 말을 잇는다.
    「안명희씨는 유학을 왔다가 정착한 경우인데 호놀루루에 식당과 서점 등 사업체가 여러 곳입니다.」

    머리를 끄덕인 내가 안명희에게 물었다.
    「남편은 어디 계시오?」

    그러자 식탁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진 느낌이 들더니 안명희가 입을 열었다.
    「몇년 전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저런, 안됐습니다.」

    혀를 찬 내가 머리를 돌려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조직을 만들려면 첫째로 돈이 든다.
    나는 그때까지 조직의 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임정 대통령도 갑자기 시켜줘서 한 것이지 조직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제 그 조직의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나 혼자만 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상해 임정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도망설」이다. 조직원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도망자로 보였을 것이다.

    생각에 잠겨 식사를 하던 나는 옆쪽 시선을 느끼고는 머리를 들었다.
    안명희가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