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③ 

     1921년 9월 초순 쯤 되겠다. 8월 초순에 하와이를 떠나 중순 무렵에 본토로 왔지만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회의」에 내가 참석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이며 전권대사 신분이었지만 철저히 무시당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이상향으로 삼고 있었지만 현실은 다르다.

    국익(國益)이라는 명분하에서는 개인의 인권(人權)은 무시되는 것이다. 하물며 타국, 타민족의 경우는 오죽 하겠는가?

    미국 정부는 나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1921년 3월에 취임한 제 29대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은 10월에 열리는 해군군축회담에 적극적이었는데 이것으로 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 세력을 확대, 유지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을 동반자 입장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

    「이번에 청원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합니다.」
    워싱턴의 작은 호텔 로비에서 마주앉은 양성준이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양성준은 내가 상해에서 돌아온 후에 조직한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워싱턴 지부장이다. 임정 대통령의 신분이었으므로 나는 대한인동지회에 공금을 내줄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 양성준도 제 돈으로 지부를 운영한다.

    양성준이 말을 이었다.
    「그놈들은 어떻게든 이번에도 청원서가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렇게 될꺼야.」
    내가 쓴웃음을 짓고 말했더니 양성준은 길게 숨을 뱉는다.

    40대 중반의 양성준은 1902년의 첫 이민자로 지금은 워싱턴에서 꽤 큰 야채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다.

    「각하, 조선놈들은 배만 부르다 하면 파당을 만들고 싸움질을 합니다. 저는 각하께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신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분개한 양성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교민신문인 신한일보에서는 내 도착 기사는 물론 동향에 대해서도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의 교민 대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워싱턴의 양성준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신한일보가 도산 안창호의 계열이었기 때문이다. 부하들이 과잉충성을 한 것이다.

    「끝까지 해볼 거야.」
    내가 탁자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면서 말했다. 군축회담에 접수시킬 대한민국의 「독립청원서」다.

    미국무장관 휴즈는 내 참석은커녕 옵서버 자격으로의 참관도 거부하고 있었는데 아예 면담도 허가되지 않았다.

    그때 커피숍 안으로 화사한 차림의 동양여자가 들어섰다. 시선이 모여졌고 여자를 본 양성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명희다. 안명희가 나를 돕겠다고 워싱턴에 와 있는 것이다.

    다가온 안명희가 앞쪽 양성준의 옆자리에 앉더니 나에게 말했다.
    「광고를 내는 조건으로 워싱턴타임즈하고 인터뷰를 하기로 했습니다.」

    내 시선을 받은 안명희가 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내 앞에 놓았다.
    「내일 오후 3시에 인터뷰를 합니다. 그리고 광고 문안은 내일까지 작성해주기로 했어요.」

    광고비를 내는 조건이었으니 돈 받고 인터뷰를 해주는 셈이다. 그리고 그 돈은 안명희가 내는 것이다. 나는 쪽지를 집어 펴 보았다. 인터뷰 담당 기자와 장소, 시간이 달필로 적혀져 있다.

    심호흡을 한 내가 안명희에게 물었다.
    「광고 가격이 얼마나 되었어?」

    그러자 안명희는 웃기만 했고 대신 양성준이 대답했다.
    「몇백불이 될텐데요. 도적놈들, 다 도적놈들입니다.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