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⑤  

    나는 동포들을 실망시켰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을 것이다. 어쨌거나 모두 내가 부족한 때문이다. 나를 믿고 의지했던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심정이 되었다.

    나는 1년여의 미국 본토 생활을 마치고 1922년 9월에 다시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한인기독교회를 통한 교민 선교와 교화, 그리고 한인기독학원으로 교육사업에 열중했다.

    또 잠깐 중단되었던 「태평양잡지」를 다시 발간시켰는데 시간을 몇십분 단위로 쪼개 사용했다. 바쁘게 일을 하는 것만이 가장 긍정적인 해결책이었다. 일을 하면 잡념이 줄어든다.

    내가 술, 담배를 안하는 것은 체질 때문이 아니다. 남이 들으면 부담이 될 것 같아 체질이 맞지 않아서 못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내 고집 때문이다.

    배재학당에 다닐적에 선교사가 준 포도주를 몇잔 마셨더니 취했다. 몽롱했고 기분이 좋아졌다.
    바로 이 맛이구나. 이래서 술을 마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둘 다 중독성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마시지 않고 피우지 않은 것이다. 술기운을 빌려 내 감정 상태를 의존하기 싫었고 담배도 마찬가지다. 아픔은 맨정신으로 겪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산이가 죽었을 때도 그렇다. 술 생각이 많이 났지만 결국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맨정신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그래야 태산에게 조금이나마 속죄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하와이에서 교육, 교화 사업을 하는 한편으로 미국 본토의 구미위원부 활동에도 집중했다. 구미위원부는 임병직에게 맡겨 놓았는데 대한민국 외교의 본산이나 같았다.

    영토를 빼앗긴 명칭만의 국가였지만 끊임없이 기사를 제공했으며 광고를 내었다. 그래야 잊혀지지 않을 것이었다.

    1925년의 어느 날, 내가 임시 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한인기독교회 관사로 민찬호가 찾아왔다. 안색이 좋지 않았으므로 나는 먼저 웃기부터 했다.

    「무슨 일이오?」
    내가 묻자 민찬호는 긴 숨부터 뱉는다. 그리고는 소파 앞자리에 앉아 나를 보았다.

    「박사님, 상해 임정에서 박사님을 대통령직에서 해임시키고 박은식(朴殷植)이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하와이로 돌아온 후부터 나는 각하 칭호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 머리를 끄덕이며 내가 다시 웃었다.

    「곧 내각책임제로 운영이 될거요.」

    내가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에만 주력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던 자들에게 나의 연이은 외교 실패는 좋은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임정은 조직만 개조하자는 개조파(改造派), 임정을 완전히 해체하고 나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創造派), 임정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현상유지파로 나뉘어 격렬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 개조파와 창조파가 임정을 떠났다.

    그래서 임정은 뼈대조차 흔들리는 상태가 되었는데 현상유지파의 김구, 이동녕 등이 새롭게 임정을 정비한 것이다. 나는 김구 등 현상유지파로부터 연락을 받고 있었으므로 이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때 민찬호가 헛기침을 하고나서 나를 보았다.
    「박사님, 안명희씨가 곧 하와이를 떠난다고 합니다.」
    「아, 그런가?」
    했지만 내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명희는 대한인동지회의 회원이며 독립운동의 열성적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명희 또한 회원이며 후원자이기 전에 여자인 것이다. 안명희에게는 가족과 가정이 필요하다.

    내가 이제는 정색하고 말했다.
    「안명희씨는 행복하게 살아야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