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⑧  

     그로부터 이틀 후에 이수환은 하와이에서 사라졌다.
    뉴욕에서 옷 장사를 한다는 소문도 났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군 군복을 입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말도 들렸지만 내 앞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주에 온다고 했던 독립단 처형자 오세만, 최말득도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지어낸 말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둘은 실존 인물이며 처형자다. 그리고 이수환도 알고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절초풍을 하고 도망칠 리가 있겠는가?

    독립운동가도 인간이며 의식주가 필요하다. 보통 사람인 것이다. 나 또한 희노애락을 느끼는 보통 사람인터라 자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특히 1919년 임정 대통령이 된 후부터 조선 동포의 기대에 부응해야 되겠다는 강박감에 머리끝이 곤두설 때가 많았다.

    그것을 극복해낸 것은 내 낙천적이며 긍정적인 자세 때문이라고 믿는다.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겠다는 오기, 일이 틀어지면 다른 기회를 주기위한 신의 배려로 돌렸으며 절망하게 되었을 때는 기도했다. 그러면 마음이 가라앉았다.

    조선 땅에서는 1926년 6·10 만세사건이 터지고 1929년에 광주학생 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일제의 기세는 더욱 드세어졌다.

    아시아 정복을 노리는 일제는 1931년 7월, 마침내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일으켜 관동군 출병 구실을 삼고 9월에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만주 땅을 완전 점령했다. 일본제국으로서는 거침없는 국력(國力)의 상승가도를 달리는 중이다.

    그해 7월,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金性洙)가 하와이를 방문했다.
    그것이 나와 김성수의 첫 인연이다. 인촌(仁村) 김성수는 1891년생이니 당시 40세요, 나보다 16년 연하다.

    「내가 밖에서 고생 안하고 놀기만 하는 것 같아서 부끄럽소.」
    한인학교와 교회를 둘러보고 나서 둘이 마주보고 앉았을 때 내가 말했다.
    「나는 용기있는 사람들이 고국 땅에 남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닙니다.」

    인촌이 정색하고 머리를 저었다.
    「여러분들이 밖에서 이렇게 이뤄놓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식민지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인촌은 와세다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곧 중암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는 1919년 경성방직을 설립했고 1920년에는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조선의 교육과 산업, 언론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나는 인촌의 젊은 모습을 보면서 가슴에 찬바람이 지나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낙엽이 덮인 오솔길을 바람이 스쳐가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것이 무엇인가? 하고 회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식민지 생활이 참 어렵습니다.」
    인촌의 말에 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내 시선을 받은 인촌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번져졌다.
    「총독부에서 하와이에 들리지 못하도록 했지만 겨우 허가를 받았습니다.」

    인촌이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이곳에서도 영사관 직원이 계속 감시를 하는군요. 지금도 밖에 지켜서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놈들을 경호원이라고 부르지요.」

    내 머릿속에 문득 한성감옥서가 떠올랐다. 사형당한 애국지사들의 얼굴도 차례로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벌써 30년 가깝게 지났는데도 조선의 자주독립은 더욱 요원해진 것 같다. 그 당시에도 일본공사의 승인이 있어야 감옥서에서 나올 수 있지 않았던가?

    그때 인촌이 문득 머리를 들고 말했다.
    「부디 건강하셔서 우리 민족을 이끌어 주시지요.」

    아마 내 모습이 초라하게 보여서 그랬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