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⑬ 

     나는 그날 모스크바를 떠났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모스크바에는 일본 고위층 손님이 와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건설한 만주의 동청철도(東淸鐵道)를 매입하려고 왔다고 했다. 만주 땅이 일본군에 점령된 마당이니 비싸게 받으려면 비위를 맞춰야 될테니까.

    나는 그토록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어도 「외교독립론」이 당시의 가장 현실적이며 유용한 해결책이라고 지금도 믿는다.

    무력(武力)에 의한 독립과 교육과 인재 양성의 방법으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조선의 가치를 어떻게든 상승시켜 일본제국의 손아귀에서 빼내는 것은 강대국의 이해에 달려있는 상황이었다.

    보라. 노일전쟁으로 원수가 되었다가도 철도 운영권을 팔아먹으려고 칙사 대접을 하지 않은가?
    강대국의 이해와 상관되게 만들면 일본은 목구멍에 거북하게 걸려있는 조선 땅을 뱉아내게 될 것이었다.
    그 방법이 최선이며 가장 빠르다. 그 후에 서둘러 힘을 갖추는 것이다.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는 지쳐서 눈을 뜨는 것도 힘이 들었다.

    「박사님, 쉬셔야겠습니다.」
    역으로 마중 나온 김재훈이 말하더니 나를 부축했다.

    「이 사람아, 놔두게.」
    쓴웃음을 지은 내가 그를 밀치고는 발을 떼었다.
    「내가 70이 되려면 아직 멀었어.」

    지난번에 투숙한 드·루시 호텔에 방을 잡은 내가 1층 식당으로 내려갔을 때는 오후 6시 정각이다.
    오늘은 식당에 빈자리가 반이나 되었는데 기둥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여자가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들었다. 프란체스카다. 모스크바를 떠날 때 연락을 했던 것이다.

    「좀 쉬셨어요?」

    앞쪽 자리에 앉은 나에게 프란체스카가 부드럽게 물었는데 3년쯤 알고 지낸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전화는 세 번을 했고 만나는 것은 오늘이 두 번째인 것이다.

    내가 지그시 프란체스카를 보았다.
    「당신하고 있으면 편안해져. 그 이유가 뭘까?」
    「날 사랑하는 것 같군요.」

    프란체스카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받았으므로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런 말은 정색하고 표현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 후에는 가슴이 가벼워졌다. 내 선입견, 내 굳어진 사고(思考)가 일순간에 풀려졌다.

    「그렇군.」
    맞장구를 치는 내 목소리도 가볍다.
    「당신은 그런 재주가 있어, 프란체스카.」
    「재주보다는 천성이죠, 박사님.」
    「박사 호칭은 빼, 프란체스카.」
    「네, 리.」
    「나, 내일 뉴욕으로 돌아간다.」

    내가 말했을 때 프란체스카의 얼굴에서 천천히 웃음기가 지워졌다.
    둥근 얼굴, 깊고 짙은 눈. 나는 프란체스카의 얼굴에 빨려들었다.

    「그럼 언제 오세요, 리?」
    「난 무국적자야. 그리고 돈도 없어서 긴 여행은 힘들어.」
    「내가 갈까요?」
    「사업은 어떻게 하고?」

    프란체스카는 어머니와 함께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내 시선을 받은 프란체스카가 한마디씩 차분하게 말했다.
    「리, 당신이 원한다면 가고 싶어요. 공장은 엄마한테 맡기면 돼요.」
    「내 나이가 몇인 줄 알지?」
    「예, 할아버지.」
    나는 웃었다. 이렇게 찔러도 아프지 않는 분위기가 있구나.

    심호흡을 한 내가 한마디씩 차분하게 말한다.
    「프란체스카, 잘 들어. 앞으로 편지나 전화로 조금씩 더 알아가도록 해. 이 할아버지는 시간이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