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⑮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며 들어온 사람은 한인회 간부 박기옥이다.

    한인학교 사무실에 앉아있던 내 앞으로 박기옥이 서둘러 다가서며 말했다.
    「박사님, 일본군이 베이징 근처의 노구교(盧構矯)에서 사건을 일으킨 다음에 천진을 점령하고 남경으로 진군하고 있답니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내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이것은 하와이의 동포 대부분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것을 미국이 예상하지 못했겠는가?

    만주국을 세운 뒤에 철저히 준비해 놓은 일본군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1937년 7월 7일의 중일전쟁이다.

    일본은 교활하게도 전쟁이란 단어까지 숨기고 그것을 노구교 사건, 또는 지나사변(支那事變) 등으로 축소 시켰지만 1937년 12월에는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南京)을 점령하고 약 30만명의 남경 주민을 학살한다.

    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유럽에서도 군국주의(軍國主義)가 기세를 부리니 일본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겠군.」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된 것은 1935년 8월이다. 히틀러는 군축회담을 무시하고 독일군을 급격하게 무장시키고 있다.

    그때 방안으로 오세환이 들어섰다. 오세환은 한인학교 교사로 서울 YMCA에서 내 강의를 받은 제자이기도 하다.

    「박사님, 한인교회 앞에서 김동술씨가 조선인들한테 맞고 이곳으로 피신해 왔습니다.」

    눈을 크게 뜬 오세환이 가쁜 숨을 가누고 말을 잇는다.
    「지금 숙직실에 누워 있는데 피를 많이 흘립니다. 병원에 가자고 해도 조선인들이 쫓아올 것이라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나는 서둘러 일어섰다. 김동술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하와이에 정착한지 10년째다.
    그는 살해당한 박용만의 지지 세력으로 적이 많았다. 우파는 물론 좌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하고 파벌이 다르면 원수가 된다.

    숙직실로 들어선 나는 벽에 기대앉은 김동술을 보았다. 얼굴이 피투성이었지만 나를 보더니 주르르 눈물을 쏟는다.

    「박사님, 조선에 있는 동생한테 돈을 보내려고 일본 영사관에 들어갔다가 나왔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아, 그러니까 배나무 밑에서는 갓끈을 매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는가?」

    먼저 그렇게 나무랬지만 내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김동술만한 애국자가 없다. 만일 김동술이 박용만 추종자가 아니었다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숙직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는 서너명이 마룻방 안으로 들어선다. 모두 낯이 익다. 좌익 계열로 김원봉(金元鳳)이 대표인 조선민족 혁명당원들이다.

    그 중 앞에 나선 최영순이라는 자가 나에게 말했다.
    「박사님, 저놈은 일본놈 첩자올시다. 일본 영사관에 들어가 정보를 주고 나오는 현장을 잡았습니다. 우리한테 넘겨주시지요.」
    「나쁜놈들!」

    내가 버럭 소리쳤더니 모두 조용해졌다. 눈을 부릅 뜬 내가 더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들이 어찌 감히 박용만을 평가한 단 말이냐! 비록 그가 죽을 죄를 지었다고 해도 나는 그가 설계한 무장독립론은 존경한다! 그런데 박용만을 지지했다고 무조건 친일파로 몰다니! 이러다 너희들하고 생각이 다르다면 다 친일파 반역자로 몰 셈이냐!」

    목소리가 컸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마룻방으로 선생들이 들어왔고 박기옥이 밀어내는 바람에 최영순은 동료들과 함께 물러났다.

    내가 가장 상처를 받은 것은 나에 대한 비난보다 동포들의 분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