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장 시련의 20년 (19)
     

     1912년에 다시 조선 땅을 떠나 1941년이 될 때까지 30년 동안 나는 무국적자였다.
    미국 시민권은 언제든지 획득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지장을 줄 이유도 없었지만 나는 무국적자로 남았다.

    그것은 고집 때문이다. 언젠가는 고국이 독립을 찾을 것이니 그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고집이다. 자랑할 것도 없었지만 내가 죽을 때 미국 시민 이승만으로 기록되기는 싫었다.

    나는 1941년 7월에 2년 동안 집필했던 원고를 책으로 출간했는데 제목이 Japan inside out(일본 내막기)이다. 나는 일본제국의 야망을 밝혔고 일본을 먼저 제압하지 않으면 미국이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썼다.

    책이 출간되자 대다수의 미국인은 전쟁을 선동하는 무책임한 조선인의 글이라고 비방했다.
    다만 유명한 여류소설가 펄·벅 여사 등 몇 명만이 일본 내부를 심도 있게 파헤친 섬찟한 소설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넉달 후인 12월 7일,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대번에 나는 예언자 취급을 받았고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나는 그보다 조국 독립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일본 군국주의 정권은 무모했다. 내가 표현한 대로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가 비탈길을 질주한 것이나 같다.

    1937년 시작된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중국 땅에 1백만 병력을 투입해 놓은 채 지금도 지지부진한 상태인 것이다.

    1942년 1월, 나는 워싱턴에서 중경(重慶)의 임정 주석 김구가 보낸 이언식을 만났다. 이언식은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10여년 동안 임정에서 일했다. 나하고 여러번 만난 사이였는데 이번에도 김구의 심부름으로 온 것이다.

    외교위원부 사무실에서 마주보고 앉았을 때 이언식이 입을 열었다.
    「임정은 좌우합작 체제가 굳어져가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김원봉의 조선군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 될테니까 그때는 군대까지 합작이 되겠지요.」
    「모두 송자문(宋子文 )의 농간이야.」

    입맛을 다신 내가 이언식을 보았다. 이언식도 어깨를 늘어뜨리며 숨을 뱉는다.

    송자문은 광동 출신으로 중국 4대 재벌 가문이다. 지금까지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정부 중심인물로 재무부장, 협상대표 등을 맡고 있었는데 공산당 세력인 모택동에게 호의적이었다.

    송자문은 재력을 바탕으로 인맥도 화려했으니 송자문의 여동생 송미령(宋美齡)은 국민당정부 수반인 장개석의 부인이며 누나 송경령(宋慶齡)은 중국의 국부 손문(孫文)의 부인인 것이다.

    그 송자문이 김구에게 공산당 세력과의 좌우합작을 강권했던 것이다. 국민당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고 있던 임정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때 이언식이 입을 열었다.
    「곧 송자문이 외교부장이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이제 루즈벨트가 동지를 하나 더 얻은 셈이군.」

    내가 자꾸 김구에게 공산주의자와 관계를 끊으라고 했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가 않는 것이다.

    이언식이 말을 이었다.
    「주석께서 그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송자문이 외교부장으로 임명된다면 한국 독립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하지.」
    「위원장께서도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독립만 된다면 소련 공산당의 도움도 받아야겠지. 하지만 소련이나 미국 또는 중국의 개입은 안돼. 그것은 대한제국 말기로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말한 순간에 내 가슴이 미어졌다.

    힘없는 나라의 운명은 언제나 같다.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단합된 힘을. 그래야 무시 받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