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번 째 Lucy 이야기 ③  

     오후 6시, 호텔 2층의 일식당 방 안에서 세 남녀가 둘러앉았다.
    인사를 나눌 적에 김태수와 고지훈은 다소 멋쩍은 표정들을 지었지만 곧 정상을 회복했다. 둘 다 교양과 지성 면에서 최고 수준의 한국인들이다.

    주문을 하고 술도 시켰는데 문득 나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내 성품이란 말인가? 좀 뻔뻔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둘 다 나와 육체관계까지 맺었고 미래를 기대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결정권은 내게 있는 것이다. 나는 식탁 건너편에 나란히 앉은 두 사내를 시선 속에 넣고 생각했다. 지금 내 시선은 둘 사이의 빈 공간에 향해져 있다. 공평하게.

    이런 상황에서 고지훈과 김태수 가계의 인연이 전해진 것은 모든 것이 짜여진 각본에 의해 움직인다는 증거일까? 김동기보다 또는 이승만과의 인연보다 더 큰 신(神)의 조작인 것 같다.

    그때 먼저 김태수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건 이승만 때문이지. 그 수기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이런 분위기가 되지 않았고 셋이 모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러자 고지훈이 빙그레 웃는다. 둘의 나이는 동갑이다.
    「노 전(前)대통령 때문이기도 하죠. 그분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루시양이 이곳에 오지 않았을 테니까.」

    둘은 지금 영어로 말하고 있다. 나 때문이다.

    그러자 김태수가 머리를 돌려 고지훈을 보았다. 얼굴에 웃음기가 떠 있다.
    「루시는 내가 데려온 거요. 미스터.」
    「대통령이 죽지 않았다면 당신이 오지 않았을 테니까 말요.」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군. 실례지만 분향소에 가셨소?」
    「안갔습니다. 당신은 이승만 전(前)대통령 묘소에 가본 적 없지요?」
    「내가 왜 갑니까?」
    「나도 마찬가지.」

    그러더니 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다. 대화 내용은 삭막했지만 둘의 표정은 부드러워서 떨어져서 보면 날씨 이야기나 하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음식이 날라져 왔고 식탁이 정리되는 사이에 내가 말했다.
    「난 1945년까지의 수기를 읽었는데 그 다음 장면을 바로 내 눈 앞의 두분이 펼쳐보이고 있는 것 같네요.」

    둘은 시선만 주었고 나도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이 2009년이니까 거의 70년 가깝게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셈이죠.」

    「모두 이승만 때문이야.」
    김태수가 바로 말을 받았고 고지훈이 뒤를 잇는다.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배은망덕한 반역자지. 대한민국으로부터 온갖 혜택을 다 받으면서 체제를 부정하고 반역질을 하고 있으니까 말야.」

    고지훈이 퍼붓는 것처럼 말을 잇는다.
    「수백만을 굶겨 죽인 실패한 공산주의국가. 이제는 1인 독재 왕국에 충성하는 반역무리가 아직도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는 것은 그자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 자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역이용하는 역적들이지.」
    이제 고지훈의 얼굴은 굳어져 있다.

    그때 김태수도 눈을 치켜떴다.
    「좌우합작 정권으로 통일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지금처럼 잘 살수 있었어.」
    「그럼 김일성, 김정일 왕조를 쿠데타로 몰아냈을까?」
    하더니 고지훈이 쓴웃음을 짓고 머리를 젓는다.

    「현실을 부정하고 억지로 가설을 세워 맞추려고 들지 마시오. 통일 핑계도 제발 그만 대시고. 이젠 초등학생도 넘어가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