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 번 째 Lucy 이야기 ④ 

     부질없다. 둘 사이의 논쟁을 들으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둘 사이의 인연을 알려주려고 나는 김동기가 보낸 팩스 카피를 가져온 것이다.
    둘의 갈등은 바로 한국 내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승만 수기를 읽은 터라 한국인의 분열과 갈등, 분파주의의 실상을 알겠다.

    송자문(宋子文)이 루즈벨트에게 한국인들은 파벌 간 분열이 심해서 독립국을 운용할 능력이 없다고 모함했지만 근거 없이 그런 말을 했겠는가?
    나도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한국계다. 더구나 이승만과 인연이 있는 가문인 것이다.

    그때 내가 불쑥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그리고는 내가 식탁 밑에서 김동기가 보낸 팩스 카피를 그들 앞에 한부씩 내밀었다.

    식탁에 회정식 요리가 차려져 있었지만 우리는 깨작거리기만 했다.
    팩스 카피를 받아든 둘이 제각기 굳은 표정으로 읽는다.

    내가 해설자처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우연히 둘 사이의 인연을 찾아낸 거야. 나하고 김태수씨는 이승만과 인연이 있었지만 김태수씨는 고지훈씨와 얽혀져 있었어. 좁은 땅에서 오랫동안 함께 부딪치며 살다 보니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나는 팩스에서 시선을 들지 않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고복만씨는 고지훈씨 증조부이고, 김만기씨는 김태수씨 조부야.」

    그때 김태수가 머리를 들고 말했다.
    「그렇지. 이런 인연은 흔하지. 이런 식으로 찾다보면 다 얽힌 것이 드러나지.」
    「하지만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되면 감동이 일어나지 않아?」
    내가 물었더니 김태수는 외면했다.

    대신 고지훈이 말했다.
    「그러네요. 내 증조부가 김태수씨 조부를 살려냈다니. 기묘한 인연이군요.」
    「김태수씨는 이런 인연이 흔하다고 하는군요. 당신처럼 감동하지 않는 것 같네요.」

    내가 말했더니 김태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루시, 날 몰아붙이지 마.」
    「넌 틀렸어.」

    정색한 내가 김태수를 똑바로 보았다.
    「이승만은 미국을 이용하려고 했던 사람이야. 오히려 미국 정부로부터 끊임없이 견제를 받았던 사람이었어. 그 수기가 주관적이었다고 해도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

    내 기세에 놀란 듯 김태수가 정색했고 내 말이 이어졌다.
    「이승만은 독선적이었고 자존심이 강했으며 타협하지 않았고 고집불통이었지만 외세를 배격하고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의지는 어느 누구도 비판할 수 없어. 너는 이승만이 미국의 주구였다고 아무것도 몰랐던 나에게 말했는데 모르고 말했다면 공부를 더 해야 되고 알고 말했다면 나쁜 놈이야.」

    그때 김태수가 소주잔을 들면서 웃었다.
    「역시 독립운동가 자손은 다르군.」
    「너도 마찬가지야. 테드.」

    술잔을 든 내가 말했을 때 고지훈이 김태수에게 물었다.
    「한의사 자손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한모금에 소주를 삼킨 김태수가 고지훈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솔직히 말하죠. 내가 고형 증조부 덕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조금씩 가슴속에 젖어들고 있단 말이요.」

    그러더니 길게 숨을 뱉는다.
    「나도 생각이 끊임없이 생성되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이 좁은 땅에 이런 인연의 얽힘을 찾아 서로 풀어 주는 것이 새로운 화합의 방법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