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① 

     해방이 되고나서 내가 서울에 도착한 1945년 10월 16일까지 두달 동안 한반도는 38도선으로 남북한이 분리되었으며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다. 점령군인 것이다.

    남한은 미 제24군단장 하지 중장 휘하의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軍政長官)으로 취임했지만 혼란했다.
    군정사령부에 등록된 정당수가 54개나 될 정도였다.

    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여운형 등 좌익 세력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으로 임명되어 있었다. 귀국한 내가 거부함으로써 나중에 없었던 일로 되었지만 그만큼 혼란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귀국한 다음날 나는 미군정청의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오전 10시경이다.

    내가 귀국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수백명 인파가 조선호텔로 밀어닥치는 소동이 일어났는데 기자회견장도 만원이었다.

    기자회견장에 선 나는 수백쌍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때서야 내가 조국 땅에 서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지난 33년간의 망명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모두 다 선명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죽은 내 외아들 태산의 얼굴도 보였다. 박용만, 안창호의 모습도.
    그러나 해방된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내가 선 남한 땅만 해도 좌우, 또는 중도로 나뉘어져 있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나는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3천만 동포 여러분.」
    그리고 나는 이번에 찾아온 자주독립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싸우겠다고 했다. 분열은 우리에게 가장 큰 적이라고 했다.

    「어떤 단체나 정당에 가입하실 겁니까?」
    기자 하나가 그렇게 소리쳐 물은 것이 기억난다.
    그때 내가 말했다.
    「나는 아직 어떤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일과 자주 독립을 위한 조직이라면 언제든지 동참할 용의가 있습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내 숙소로 돌아왔더니 정오 무렵에 송진우, 장덕수, 조병옥, 허정, 김도영, 김병조 등 한민당 간부들이 찾아왔다.

    「이대로 가면 남한도 좌익 세상이 됩니다.」
    먼저 송진우가 말했다.

    맞는 말이다. 해방 후 가장 빠르게 움직인 조직이 공산당 조직이다.
    이미 북쪽은 소련군 진주와 함께 이른바 연안파(延安派)로 불리는 좌익 조직이 소련군의 배후 지원을 받고 기반을 굳혀가는 상황이다.

    그리고 남한에서도 여운형과 박헌영의 조선인민공화국, 즉 인공이 미군이 진주하기도 전인 9월 6일에 선포되었다. 미군정청이 인공은 물론 중경 임시정부도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송진우가 말을 잇는다.
    「박사님께서 우리들의 지도자가 돼 주십시오. 그럼 좌우 세력의 지지를 받게 되는 유일한 지도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내가 인공의 주석으로 임명되었으니 겉으로는 그럴 듯 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여 인공의 중심인물이 된 박헌영이 받아들일 것인가?

    쓴웃음을 지은 내가 우익 지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신명을 바쳐 남은 생을 조국에 바치지요. 오늘 오후에 그 사람들이 온다고 했으니 상의 해보겠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착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인공, 즉 조선공산당 세력은 송진우 등의 한민당 세력을 친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직후여서 친일은 곧 역적, 매국노로 매도당하는 상황이다.
    조선공산당은 한민당까지 끌어안은 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한민당 또한 마찬가지다.

    그때 장덕수가 말했다.
    「박사님, 미군정청에 의해서 임정, 인공이 다 부인된 상황이니 우파 정당의 설립이 시급합니다. 일단 박사님을 중심으로 우파 정당이 통일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민당은 그렇다고 해도 다른 우파 조직은 합류해올 것인가?

    지난 30여년 동안의 일이 다시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좌익 세력의 단결은 놀랍다. 그 원천이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