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④ 

     나는 철저히 중립 입장을 취하면서 귀국한지 1주일째가 되는 날인 10월 23일, 전국의 65개 정당 대표들을 내가 머물고 있는 조선호텔로 모이도록 했다. 그리고는 2백여명 대표들의 합의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즉 「독촉」을 발족시켰다.

    국민당 대표 안재홍이 제안하여 나는 「독촉」의 의장을 맡았는데 좌우 세력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셈이다.

    당시의 정당은 우파인 한민당이 9월 16일 발족되었으며 극좌파인 조선공산당도 박헌영의 주도로 9월 16일, 안재홍이 주도한 중도우파의 국민당은 9월 26일 창립했고 11월 24일 귀국한 백범 김구의 한국독립당도 중도우파에 속하겠다.

    또한 여운형이 11월 2일에 중도좌파 계열의 조선인민당을 창설했기 때문에 미군정당국이 한국인은 셋만 모이면 당을 만든다고 투덜댈만 했다.

    나는 10월 24일, 돈암동의 일명 돈암장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송진우가 장덕수에게 부탁해서 마련된 사택이다. 그날 밤 늦게서야 내가 혼자되었을 때 박기현이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박사님, 군정사령부에서 얻은 정보인데 미·소가 한반도를 신탁통치할 것 같다고 합니다.」
    「난 올해 2월 얄타에서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한반도를 넘겼다고 기자회견을 했었다.」

    그래서 유엔 총회장은 난리가 났고 미국무부는 진땀을 흘리며 해명을 해야만 했다.

    나는 친구 박무익의 아들 박기현에게 이젠 해라를 한다.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라면 그 보다는 나은 셈이다.」
    「군정당국은 한국인의 자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미련한 사람들.」

    저도 모르게 나는 버럭 화를 내었다. 나에게 미련한 사람이란 표현은 가장 심한 욕이다.

    「한민족의 우수성을 내가 기어코 입증시켜 보일 테다. 그 미련한 놈들한테 말야.」
    박기현이 꾸중을 듣는 아이처럼 시선을 내렸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에서 루즈벨트와 처칠, 장개석의 회담 후에 발표된 선언이 떠올랐다.

    「우리 3대 열강국가는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이 적당한 절차를 밟아 해결되도록 정한다.」

    이 '적당한 절차'라는 말이 그때도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하지 중장은 남한 땅에 진주할 적에 최고 사령부나 국무부로부터 확실한 지침을 받지 않은 것이 드러나고 있다.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이 나한테 미국의 진주 목적은 한국인의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기아와 질병에서 구해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인 것 같다. 북쪽의 소련군이 김일성을 앞세워 공산당 조직을 일사천리로 굳혀 나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때 박기현이 말했다.
    「박사님, 제가 중국에서 겪어봐서 압니다. 공산당 조직력은 강합니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곧 망할 것이고 이제 소련과 중국까지 공산진영이 되면 한반도가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박기현은 중국 국민당군의 미군 고문단이었던 것이다.

    다시 박기현의 말이 이어졌다.
    「좌우합작은 말 뿐이지 우익의 결집력은 마른 모래나 같습니다. 미국이 중국을 국공합작으로 일본에 대항시켰지만 결국 공산당만 강화시켰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내가 어린아이처럼 물었더니 박기현이 거침없이 대답한다.
    「38선 북쪽은 이미 공산당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쪽 땅에 좌우합작이라니요? 미군정청이 한민당을 밀긴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남쪽도 공산당 국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