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⑨ 

     대통합의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은 하루도 안 되어서 산산조각이 났다.
    다음날인 1945년 12월 30일 새벽, 한민당의 수석부총무이며 우파의 거목인 송진우가 원서동 자택에서 암살 된 것이다.

    저격범은 체포되었는데 청년단원으로 송진우가 미국의 위세를 빌어 소통을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저격 이유를 대었다.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고 나는 큰 기둥을 잃은 충격을 받았다.

    송진우는 우익 인사로 일제치하에서 조선 땅에 남아 견딘 사람 중의 하나다.
    12월 중순경에 중경 임정 요인들과 한민당 간부들과의 저녁식사 자리에서 말다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중경 임정의 내부부장 신익희가 국내에 남았던 인사는 크거나 작거나 모두 친일파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것은 잘못된 발언이다. 나는 오히려 국내에서 남아 견딘 사람들이 더 애국자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때 송진우가 신익희 등 임정요인들에게 너희들은 밖에서 손이나 벌리고 다녔지만 우리는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 이렇게 만들고 견디었다. 너희들이 이렇게 지금 밥 먹고 모인 것이 도대체 누구 덕분이냐? 하고 일갈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는 송진우를 신임해서 좌파나 우파에게 연락 할 일이 있으면 불러 시켰고 상의도 했다. 그러니 하지의 화가 폭발한 것도 당연했다.

    더욱이 그 다음날인 12월 31일, 반탁시위대 수만 명이 모인 자리에서 임정은 다시 정식 정부로 인정해 줄 것을 군정청에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고 임정 내무부장 신익희는 전국의 행정청 소속 경찰기구와 한인 직원을 임정 내무부에 인계하라고 주장했다.

    그날 밤 군정청에 다녀온 박기현이 나에게 말했다.   
    「하지는 송진우 선생을 암살한 한현우가 백범의 지시를 받았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송진우는 1889년생이니 올해 57세. 중앙학교 교장을 지냈고 동아일보에서 30여년간 사장, 고문, 주필을 지냈다. 1936년,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정간 되면서 송진우도 사직을 했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좌익의 건준에 맞서 우익을 규합하여 한민당을 창립했으니 우익의 공신이다.

    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고하(古下), 조국의 해방은 보시고 갔구려. 그러나 참으로 원통하오.」

    내가 귀국했을 때 가장 먼저 맞아주고 거처할 집까지 주선해준 사람이 송진우인 것이다.

    「그래서.」
    박기현이 서재에 둘이 있는데도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임정의원 전원을 전에 인천에다 일본군이 세워놓은 미군 수용소에 수용했다가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웠는데 조병옥 경무부장이 강력히 만류해서 겨우 취소시켰다고 합니다.」
    「허, 날 체포한다더니 이제는 임정 요인들인가?」

    기가 막힌 내가 쓴웃음을 지었을 때 박기현이 말을 이었다.
    「하지는 격노해 있습니다. 곧 무슨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

    박기현의 말이 맞았다.

    다음날인 1월 1일, 조선호텔의 하지 사령관 사무실에서 열린 군정 당국과 임정 측의 회의에서 눈을 치켜 뜬 하지가 말했다.
    「난 송선생의 배후를 끝까지 캐내어서 책임을 물을 겁니다. 이건 개인의 암살 사건이 아니라 당신들 국가, 국민에 대한 모독이고 반역적 행동이오.」

    그리고는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임정을 인정하고 정권을 이양하라니, 당치도 않소. 이것은 경고요. 나는 그럴만한 권한과 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