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⑮ 

     1946년 3월 20일부터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신탁통치 문제에 대한 미·소 공동위원회는 두달 가깝게 끌다가 5월 6일에 결렬되었다.

    그러나 하지는 여운형과 김규식을 좌우 대표로 삼아 각각 5명씩의 좌우 인사들로 구성된 합작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른바 중도 정부를 지향하는 기구였는데 실제로 우익과 좌익의 대표격인 한민당과 공산당의 격렬한 반발을 받았다. 그렇다고 한민당과 공산당이 제휴한 것도 아니다.

    김구의 한독당은 반탁운동을 임정 승인 운동으로 연결시키다가 군정당국의 제재를 받고 있는 중이었으며 나는 반공, 반소의 주장이 너무 강해서 군정당국은 물론 미국무부의 기피 인물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러던 어느 날, 1946년 8월 중순경쯤 되었다. 7월 하순에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늦은 밤에 김구가 수행원 한명만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응접실에서 김구와 둘이 마주앉았는데 프란체스카도 나오지 말라고 했다.

    김구가 입을 열었다.
    「공산당이 폭동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자들은 조직이 잘 되어있고 단결력이 강해서 정국이 혼란해질 것 같습니다.」

    나도 박기현과 이제는 내 비서 역할을 하고 있는 이철상한테서도 들은 터라 머리만 끄덕였다.

    김구가 불쑥 묻는다.
    「형님,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세우면 북한은 영영 떼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미 떼어졌네.」
    내가 자르듯 말했고 김구도 잠깐 침묵을 지켰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했지만 소련은 일본이 항복도 하기 전인 8월 9일에 두만강을 넘어 북한 땅에 들어왔다. 8월 24일에 진주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간접통치를 했다.

    그리고는 1945년 9월 중순, 소련군 소령출신 김일성을 데려와 국내 좌익을 누르고 주도권을 장악시켰다. 1945년 10월 중순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구성되어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임명되었고 11월 중순에는 「북조선5도행정국」이 설치된다.

    그리고 1946년 4월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북조선 공산당」으로 바꾸고 독립된 체제로 발족시켰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정부로 직을 설립하여 「인민민주주의」 독재정권을 세워 3월에는 전국의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이로써 지주계급은 격심한 타격을 받았으나 빈농이 중농의 수준이 되면서 혜택을 입은 농민들이 대거 공산당에 입당하여 처음에 4천5백명이었던 당원이 27만명으로 늘어났다.

    급속한 개혁이었지만 김일성 정권의 기반은 단단하게 굳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야말로 일사분란한 행동이었는데 소련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윽고 다시 김구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형님이 정권욕 때문에 단독 정권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신념 때문일세, 아우님.」

    내가 거침없이 말을 받았으므로 김구가 빙그레 웃었다.
    「형님은 고집이 너무 세시오.」
    「그건 아우님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래놓고 내가 길게 숨을 뱉았다.
    「그래, 난 욕심이 있네. 이 나라를 꼭 민주주의 체제로 탄생 시키겠다는 욕심. 그리고,」

    머리를 든 내가 같은 70객이며 온갖 풍상을 같이 겪은 이 노 애국자를 보았다. 고생은 김구가 더 많이 했으리라.

    「그 나라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어서 통치하고 싶은 욕심이 있네. 오늘 아우님이 나한테 그 말을 들으려고 오신 것 아닌가?」
    하고 웃어 보였더니 김구도 따라 웃는다.

    「하긴 형님은 이름만 주석이었고 대통령이셨지요. 욕심 부릴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