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18) 

     돈암장(敦岩莊)은 1939년에 지은 전통 한식 건물로 나는 물론이고 프란체스카도 좋아하는 집이었다.
    장덕수가 마련해준 집이었는데 그것을 주선해준 송진우는 이제 암살을 당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테러와 암살이 횡행하는 시기였다.

    30여년간 무국적자로 해외를 떠돌면서 급박한 상황을 셀 수도 없이 겪은 터라 박기현이 돈암장 경비를 늘려야겠다고 건의했지만 나는 보류시켰다. 미군정 당국에서 보내준 병사 세명과 박기현과 이철상 등 대여섯명도 과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이 내 조국이라는 선입견도 작용했던 것 같다.

    내가 미국행을 결심한 지 며칠 후에 밖에 나갔던 이철상이 서둘러 응접실로 들어오더니 말했다. 오후 5시쯤 되었다.
    「박사님, 공산당에서 박사님을 암살 대상 1순위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 정보는 당 특위 요원한테서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결정을 늦게 했구나.」

    쓴웃음을 지은 내가 힐끗 주위를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 말이 프란체스카한테는 들어가지 않도록 해. 나는 그것이 걱정이야.」
    프란체스카는 이제 한국어를 조금은 알아듣는다.

    그러자 여전히 정색한 이철상이 말을 이었다. 
    「박사님이 미국에 가신다는 소문이 퍼지고 나서 작업을 서둔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도록 하시지요.」
    「알았어. 조심하지.」

    이철상을 안심시킨 내가 응접실을 나와 옆쪽 대기실로 들어섰다. 회의실로도 쓰이는 방이었는데 손님인 노인 한분과 앉아있던 박기현이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노인이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이제 뵙게 되어서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내가 자리에 앉았더니 박기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노인이 나보다 더 연상으로 보였으니 윗사람을 공경하는 풍습 상 박기현에게는 의외로 보였으리라. 아직 박기현과 노인은 그 자리에 서있다.

    그때 내가 불쑥 노인에게 물었다.
    「지금 연세가 어떻게 되오?」
    말투가 거칠어서 박기현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

    그때 노인이 대답했다.
    「예, 올해로 78세가 되었습니다.」
    「나보다 여섯 살 위였지, 참.」

    그리고는 길게 숨을 뱉는 내가 노인을 보았다.
    「참 그대는 추하게 늙는구려.」
    이제는 박기현이 눈을 치켜떴지만 노인은 시선을 내린다.

    내가 말을 이었다.
    「그래, 주미공사를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 여장을 하고 숨어 왔다던데, 맞소?」

    노인은 주미공사를 지낸 김윤정(金潤晶)이다.
    내가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나 고종의 청원서를 건넸더니 국무부를 통해 정식 절차를 밟으면 검토 해보겠다고 해서 만세까지 불렀지 않았던가. 그러나 역적 김윤정은 본국의 훈령이 없으니 청원서를 받지 못하겠다고 했다. 김윤정은 고종황제의 신하가 아니라 이미 일본의 내통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귀국 후 김윤정은 승승장구하며 충청북도 지사, 고등관 1등, 중추원칙임참의, 해방되던 작년에는 중추원 고문까지 올랐다. 그 김윤정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때 김윤정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간절한 표정이다.
    「각하, 목숨만 살려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옛날 정의를 생각하시어...」
    「이 자를 끌어내라.」

    내가 박기현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역적, 매국노다. 그것도 참으로 비열한 인간이다.」

    그리고는 내가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