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분열된 조국 (29)

    그리고 1947년 3월 2일, 1500여명이 모인 한국국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다.
    김구는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대표자회의는 한국 정부이며 의장이 곧 정부대표임을 결의하자고 했다가 회의에서 부결되었다.

    그러자 김구는 의장직을 사임했고, 미국에 있던 내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김구는 대표자회의에서 한국 정부를 구성해 놓고 그것을 반탁운동과 연결시키려고 했지만, 대의원들의 반발로 무산된 것이다.
    반탁이나 정부 수립에 대한 반발이 아니다. 내가 제외된 것에 대한 반발이다.

    김구의 대표자회의 소집 소식을 들은 후부터 나는 귀국을 서둘렀지만 한국으로의 재입국 허가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미 국방부와 국무부를 오가는데 시간이 걸려서 1945년 해방이 되었을때보다고 더 힘들었다.
    3월 초순, 밖에서 돌아온 임병직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국무부에서 박사님의 귀국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놀랄 일도 아니었으므로 시선만 주는 내게 임병직이 말을 잇는다.
    「하지는 신원확인증을 보냈는데 국무부에서 미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담당이 누군가?」
    내가 물었더니 임병직이 머리를 젓는다.
    「다 모른다고 합니다. 개자식들입니다.」
    나는 임병직이 내 앞에서 욕설을 하는 것을 처음 들었다. 이맛살을 찌푸린 내가 임병직에게 점령국 담당 국무차관보 힐드링 장군에게 전화를 연결 시키도록 지시했다.

    힐드링은 국무부 내에서 몇 명 안되는 우호적 인사였지만 아직 역부족이다.
    그때는 마치 미국무부가 붉은 색 소련 깃발로 휩싸여진 느낌이 들었으니까.

    「아, 박사님. 재입국 때문에 연락을 하셨지요?」
    내 전화를 받은 힐드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곧 국방부에서 수송기를 준비 해 놓을 것입니다. 아마 내일쯤 연락이 될겁니다.」
    「고맙습니다. 힐드링씨.」
    내가 진신므오 사례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임병직이 공군수송사령부에 가서 도쿄까지의 항공료를 지불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가 3월 10일쯤이다.
    벌써 열흘 정도나 출발이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날, 호텔에 있던 임병직이 공군사령부 대령이라는 사람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비행기가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놀랍고 화가 난 임병직이 소리쳐 물었더니 대령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국무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한국인 이승만이 미공군 비행기를 사용하여 귀국할만큰 중요한 임무가 없으니 비행 계획을 취소하시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힐드링 국무차관보도 당황했다. 이것은 힐드링의 윗선, 국무장관 로지 마셜의 묵인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밖에 나갔던 임연신이 뛰어 들어왔다.
    「박사님, 오늘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되었습니다!」
    흥분한 임영신의 말을 들으면서 내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새로운 대세(大勢)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트루만 독트린은 1947년 3월12일 트루만이 미 의회에서 미국 외교정책에 대한 새로운 원칙을 발표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 소수자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나라에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트루만은 소련의 위협을 받고 있는 그리스와 터키에 4억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바로 <냉전>의 시작이며, 미국 외교정책의 대전환이 된 것이다.

    내가 임영신에게 말했다.
    「내가 트루만 독트린이란 선물을 가져가게 되었군. 비행기를 못 타게 하는 바람에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