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⑤

    「할아버지가 73세입니다.」
    하고 잭슨이 말했으므로 내가 소리내어 웃었다. 나하고 동갑인 것이다.
    「잭슨, 내가 네 할아버지하고 동갑이다.」
    「오, 할아버지」
    잭슨이 따라 웃는다.

    미국 청년들은 성품이 밝은 편이다. 그렇다고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보통 청년들은 한국인처럼 어른을 존중하고 노약자를 보호한다.
    돈암장을 나온 나와 잭슨은 나란히 샛길을 걷는다. 이곳 뒷길은 인적이 드물고 아직 빈땅이 많아서 공기도 맑다. 내가 어둠에 덮여지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잭슨, 이 땅이, 이 민족이 메마르고 가난하게 보이지만 5천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단다.」
    「5천년입니까?」
    잭슨의 놀란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렇게나 길어요?」
    「그래. 수많은 왕국이 이어졌지. 고조선, 신라, 고려, 조선, 이렇게 한국인의 혈통을 이어왔다네.」

    「일본하고는 언제 전쟁을 했죠?」
    잭슨은 조선이 일본과 전쟁을 해서 식민지가 된 것으로 아는 것 같다. 왕국들이 다 그렇게 망했으니까.
    「40년쯤 전이지.」
    「그렇군요. 박사님은 그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다던데, 맞습니까?」
    그렇게 아는 미군 병사들이 있다. 그것도 한국 역사를 제법 한다는 미군이 그런다.

    쓴 웃음을 지은 내가 말했다.
    「아냐, 난 왕을 몰아낸 사람 중의 하나란다. 그런데 잭슨...」
    걸음을 늦춘 내가 잭슨을 보았다.
    「네 꿈은 뭐냐?」

    「난 제대하면 오스틴의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어요.」
    잭슨의 목소리에 활기가 띄워졌다.
    「라세크 아세요? 오스틴에서 50마일쯤 떨어진 마을인데...」
    「모르겠는데...」
    「그곳이 내 고향이죠. 마을 인구는 3백명쯤 돼요. 작은 마을이죠. 거기에 내 부모님, 여동생, 조부모까지 살고 있어요.」
    「............」
    「오스틴에는 내 숙부가 자동차 정비소를 하는데 제대하면 와서 일 하라는군요. 오스틴은 아시죠?」
    「그럼. 그 남쪽 휴스턴도 가 봤지.」
    「그래요? 아주 좋지요?」
    「그래. 따뜻하고.」
    「여자들이 끝내줘요. 특히 오스틴은...」
    그때 앞쪽에서 인기척이 났으므로 우리는 말을 그쳤다.

    사내 둘이 다가오고 있다.
    어둠 속이었지만 양복 차림의 한국 청년들이다.
    이곳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만큼의 샛길이었고 좌우는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다.

    다가오는 그들을 본 잭슨이 내 앞장을 섰다. 길을 비켜줄 겸 보호하려는 자세였다.
    앞에서 다가오던 둘도 어느 덧 앞뒤로 섰다. 거리가 3미터쯤으로 가까워졌을까?

    「퍽!」
    둔탁한 소음이 울린 순간에 나는 숨을 멈췄다.
    눈만 치켜떴던 나는 앞에서 걷던 잭슨이 무엇엔가 발에 걸린 것처럼 땅바닥으로 엎어지는 것을 보았다.

    「퍽!」
    다시 한번 소음이 울렸을때 나는 어금니를 물었다.

    그 순간, 내 앞까지 다가 온 사내 하나가 두 손을 휘저으며 옆쪽 풀숲으로 넘어졌다.
    총에 맞은 것이다. 둘 다 신음 한번 뱉지 않고 쓰러졌다.
    그러나 내몸은 굳어진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때 남아있던 사내 하나가 말했다.
    「박사님, 지금 이 둘은 서로 맞 쏘고 죽은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셔야 돼요. 자, 돌아가세요.」

    나는 홀린 것처럼 돌아섰다. 내가 몇발짝 떼었을 때 뒤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