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⑦

    하지는 나를 연금상태로 묶어 놓고 나를 대신하여 정국을 주도할 대역(代役)을 찾았다.
    그것이 서재필이다.
    명망있는 인물을 찾다 보니 하지는 서재필이 적역이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데 서재필이 누구인가?
    송재(松齋) 서재필은 1864년 생이니 당시 84세가 되었다.
    나보다 11년 연상으로 21세때인 1884년에 김옥균, 박영효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조선말의 개혁가다. 또한 서재필은 미국에 망명하여 시민권을 얻고 의학박사 학위를 딴 의사이며 1895년 32세의 나이로 귀국했을 때 독립협회를 창설하여 나와 인연을 맺었다.
    그 후로 내가 미국 망명 중에 서재필의 도움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갑자기 84세의 미국시민 서재필을 데려오다니, 미국명 필립 제이슨(Phillip Jaisohn)인 서재필은 하지에게 이용당한 셈이다.
    하지는 서재필을 전면에 세워 좌우합작 정책을 밀고 나갈 작정이었지만 한국민을 무시한 처사였다. 그것으로 하지의 무지(無知)와 오만이 만천하에 드러난 셈이었다.

    미군정 고문으로 임명된 서재필은 중도파, 좌익의 환영을 받았지만 정국을 헤쳐 나가기에는 주관이 분명하지 못했고 하지의 꼭두각시 역할에 서재필 자신의 위상마저 무너졌다.
    7월19일 여운형이 암살되자 이 노(老) 애국자는 현실을 피부로 느낀 것 같다.
    그때부터 다시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으니까.

    나는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는 석달동안 돈암장 밖으로 외출이 금지 되었고, 대국민 연설은 물론 신문 기고, 전화까지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오직 박기현등이 전해주는 소식만 들었다. 방문객도 통제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1947년 8월20일, 소련 측이 더 이상 미-소 공동위원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미-소 대화는 결렬되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남한만이라도 자유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내 말이 결국 맞지 않았는가?

    미국이 미루고 억지를 부리는 동안에 남한은 무법 천지가 되었다.
    좌우합작을 미군정 당국이 끝까지 내세우는 바람에 공산당은 「남로당」을 세워 남한정복 투쟁에 나서고 있다.

    지난 3월, 트루만 독트린이 발표되지 않았다면 미국무부와 하지는 소련과 공산당에 대해서 양보를 거듭했을 것이다. 당시의 미국정부도 정책의 격변기를 맞은 상태여서 융통성 없는 야전군인 하지가 이 미묘한 한반도 문제를 당해내기는 역부족 아니겠는가.

    제54차 본회의를 끝으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며칠 후였으니 8월 하순이 되겠다.
    저녁 무렵 돈암장으로 군정청 소속의 제임스 매디슨이란 자가 찾아 왔다.
    40대 후반쯤의 사내였는데 수행해 온 미군 대위를 밖에서 기다리게 하더니 나하고 둘이 응접실에서 마주 앉았다. 나와는 초면이어서 마침 집에 와 있던 장기영이 동석했다. 며칠 전에 방문 금지가 풀린 것이다.

    메디슨이 말했다.
    「박사님, 이젠 소련과의 합의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시선만 주었고 매디슨의 말이 이어졌다.
    「전 군정청 소속이 아닙니다. 국무부 힐드링 차관보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신가?」

    머리를 끄덕인 내가 매디슨을 보았다. 존 R 힐드링은 점령국 담당 국무차관보로 지난 4월 내가 귀국할 때도 도움을 주었다. 장군 출신이지만 정세 판단이 정확한 인물이었다.

    매디슨이 말을 잇는다.
    「저는 내일 귀국합니다. 차관보께 보고를 해야 될 텐데 박사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전해드리지요.」
    지금까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정국이 흘러갔던 것이다.
    소련과의 회담도 결국 소련의 거부로 결렬될 것이라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