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⑬ 

     

    좌우합작 위원회는 1947년 12월 해체되었지만 김규식등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미국이 1947년 3월 크루만 독트린에 의거, 소련의 일방적인 팽창정책에 제동을 걸게 됨으로써 좌우합작위원회에 대한 기대도 사라졌다.
    소련이 남북한 총선을 반대하고 유엔선거감시단 입북을 거부한 것은 명백한 유엔법 위반이며 한반도 통일의 기회를 박탈한 행위였다.

    그러나 당시 남한은 공산당의 폭동으로 소련과 김일성 일당을 성토할 정신이 없었다고 할까? 남한 전체가 공산당에 넘어갈 상황인 것이다. 이열치열(以熱治熱), 즉 열로써 열을 다스리고, 성동격서(聲東擊西), 동에서 칠듯 하다가 서쪽을 치는 공산당 전술이다.
    북한 땅이 소련 수중에 들어간 것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남한 땅은 공산당이 혼란에 빠뜨렸고, 지도자들은 뭉치기는커녕 사사건건 내보갈등을 일으켰다.

    우익인사들의 잇따른 암살도 정국을 더욱 무정부상태로 빠뜨렸다.
    북한은 이미 1948년 초에 인민군을 창설하고 헌법초안을 공포하여 독자정권의 수립준비를 마쳤다.
    북한이 남한보다 인구가 적어서 총선에 불리하다는 이유로 유엔의 총선결의를 반대한 소련인 것이다.
    북한이 인민군 창설까지 마쳤는데도 남한의 단독 총선은 안된다며 지도자들이 나를 비판하고 있다. 내가 권력을 쥐려고 그런다는 주장이다.

    훗날, 역사가 증명해주리라. 대한민국이 굳건해진다면 해방전후 역사가 미국과 소련의 사료에서 명명백백하게 밝혀진다면 과연 누가 역적같은 짓을 하고 누가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웠는지 세상은 알리라.

    나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1948년 당시의 나는 공산당의 마수에서 남한을 지키려고 그야말로 나 혼자서 고군분투했다. 만일 이런 사실이 대한민국 치하에서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나라가 될 것이다.

    1948년 3월12일, 김구와 김규식이 남한만의 총선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북한은 화답을 했고 남한의 공산당 무리들은 환호했다.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리분별이 될 것이다.

    북한은 이미 소련의 허수아비 김일성 단독정권이 인민군까지 창설했다. 그런데 유엔감시단 입북도 금지된 마당에 이제는 미-소 양국군대를 철수시킨 후에 남북한 총선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공산당 통일도 좋다는 뜻이었고 소련과 김일성 일당과 내통한 것처럼 국민들에게 비치기도 했다.
    미국군은 멀리 바다 건너가고 소련군은 두만강만 건너면 되는데....

    나는 그래서 열흘쯤 후 3월24일에 그 두 김씨에게 사리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고 조목조목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내부 갈등처럼 보여서 부끄러웠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는 판국이다.

    그러던 4월3일, 제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남로당원 350여명이 제주도 군정 경찰을 습격하여 무력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단독정부 반대’와 ‘남북총선거’를 외치는 그들의 반란으로 피아간에 사상자가 막대하게 발생하였다.

    기세를 받은 김규식이 다시 성명을 내어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면 미국의 내정간섭을 받게 될것이라고 비난했다. 소련 위성국이 된 북한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 같았다.

    나는 먼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방침을 굳히고 유엔 선거감시위원단의 협조를 받아 추진해 나아갔다. 3월29일 동대문(을)구에 국회의원 후보 등록을 했지만, 김구와 김규식은 거부했다. 그때 내가 김규식을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다.
    「이봐, 동생. 현실을 바로 깨닫기 바라네. 소련이 북한 문을 열어줄 것 같은가?
    자네가 김일성 치하에서 견딜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