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분단 (30)

     나는 분단된 한반도의 남한을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건국했다.
    북한이 소련 체제를 모방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건국(建國)!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 새 나라를 세운 것이다.

    나는 이것을 신라나 고려, 또는 조선의 개국(開國)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새 왕조(王祖)로의 이동이 아니라 새로운 체제, 새로운 국민의 탄생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적인 제도와 사고(思考), 그리고 실천력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 초창기의 기반이 굳건해야만 대한민국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다.

    나는 준비된 지도자라고 자부한다.
    나는 개혁운동을 하던 당시, 한성감옥서에 갇혀 있었던 1904년에「독립정신」이란 책을 썼다. 그 책의 서술 목적에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민족의 멸망을 예방하기 위하여 낡아빠진 절대군주제 대신 인민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허용하는 입헌주의 정부를 도입할 필요성을 느낀다.」

    국가보안법과 강군육성, 여성해방과 기독교와 종교 보급이 내가 중점적으로 개혁한 과제였다.
    그러나 온갖 방해와 난관이 가로막는다.
    1949년 3월에는 제헌국회의원중에 공산당 프락치가 잠입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국회부의장 김약수등 13명이 남로당 간부 박시현등과 접선한 후에 북한의 박헌영에게 보내는 보고서가 발각된 것이다. 이른바 국회 프락치 사건이다. 국회의원 13명이 간첩이었던 것이다.

    1948년 7월,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한 후인데도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했다.

    그리고는 9월에 파리에서 개최되는 유엔 총회에 남북협상파들을 파견하여 대한민국의 유엔 승인을 저지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수석대표 김규식이 출발을 못함으로써 방해 공작은 좌절 되었지만 건국의 부정세력은 끈질겼다. 허나 이제는 온 국민이 북한의 실상을 알고 있는터라 흔들리지는 않는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경교장 2층에서 포병소위 안두희에게 살해되었다.
    총탄 4발을 맞고 병원에 실려갔지만 곧 절명 했다는 것이다. 안두희는 현장에서 자수하고 체포 되었는데 김구와 둘이 면담 중이었다고 했다.

    그 보고를 들은 나는 먼저 김구의 나이부터 떠올렸다. 나보다 한 살 연하였으니 올해로 74세였구나, 그러자 만감이 교차했다. 인간은 어차피 유한한 생명체다.

    내가 1920년, 뒤늦게 상해 임정 대통령으로 부임해 갔을 때 가장 나에게 힘을 실어준 인사가 당시에 경호처장이었던 김구다. 그 후로 맺은 수십년의 인연, 머리를 든 내가 앞에 서있던 체신장관 장기영에게 물었다.
    「백범은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기억 될것이네.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눈을 가늘게 떴던 장기영이 덧붙였다.
    「위대한 민주주의, 평화주의 자로도 불릴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머리만 끄덕이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결국 김구도 암살을 당했다. 장기영이 방을 나갔을 때 나는 길게 숨을 뱉았다.

    김구는, 내 아우 김구는 과연 대한민국 국민으로 죽은 것일까? 김구는 대한민국을 인정하고는 있었을까? 그때 내가 저도 모르게 말했었다.

    「나는 내가 세운 내 나라, 대한민국 땅에서 죽는다니 이 얼마나 행복한 운명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