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한민국(5)

    1949년 4월 21일 양자강을 건넌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4월 24일 남경을 거쳐 5울 27일 상해를 함락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개석의 국민당군을 대만으로 밀어붙이고 10월1일,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공산당 주석 모택동이 중국을 평정한 것이다.
    국공합작(國共合作)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함작 노선을 적극 지원하여 일본군에 대항시켰던 미국 정책의 실패였다. 그것이 해방직후 좌우합작을 적극 추진했던 미군정 당국의 행동과 같지 아니한가? 공산당의 중국 대륙 석권에 미국은 시침이를 딱 떼고 물러난 것과 마찬가지로 좌우합작을 밀어 붙였다가 한반도가 공산화 되었을 때도 미국은 눈하나 깜박 하지 않고 물러났을 것이다.

    다행히 한반도의 남쭉은 공산화를 면하고 대한민국으로 건국 되었지만 1949년에도 치열한 내전을 치르는 중이다.
    국회 소장파 의원중에 10여명이 남로당 프락치로 드러난 것이 그 극명한 예가 될 것이다.

    「미국을 잡아야 돼.」
    1949년 10월의 어느날 내가 경무대에서 조병옥과 임병직을 앞에 두고 말했다. 혼란한 와중에도 당시의 나는 농지개혁법 통과에 전력하고 있었는데 지주계급을 대변하는 한민당측과 농민측인 소장파 의원과의 대립이 격렬했다.
    그러나 소장파 의원들의 프락치 사건으로 지주계급 측에 유리한 조건이 우세한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농기개혁법 이야기를 하다가 화제를 돌렸으니 둘은 눈만 껌벅였다.

    정색한 내가 앞에 앉은 둘을 번갈아 보았다.
    나는 기회만 있으면 민국당, 소장파 의원을 가리지 않고 내 신념을 토로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가르치려고 드는 모양새로 보여 거부감을 사기도 했지만,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설득과 다수결로 성립이 된다.
    내가 말을 이었다.

    「대한미국이 단독으로 국방과 교육, 경제발전을 이루려면 굉장한 돈과 노력이 필요한데 지금 상황으로는 불가능하네, 따라서...」
    내가 둘을 번갈아 보았다. 둘 다 상황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내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긴장하고 있다.
    「어떻게든 미국과 동맹을 맺던지 또는 군사협정을 맺어서 이용해야 되네.」

    「각하」
    조병옥이 나섰다. 부리부리한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그럼 미국에 나라를 팔아 먹는다고 공산당이 선동하게 될 겁니다.」
    「공산당이야 당연히 그러겠지.」
    「국민들이 선동에 넘어갈수 있습니다.」
    「지금 삼팔선을 공산당이 기를 쓰고 막고 있지만 하루에 수천명이 넘어오네.」
    둘은 시선만 주었고 내가 말을 이었다.
    「선전 선동으로 국가를 유지, 발전 시킬수는 없어. 이상만 가지고 국가를 경영할 수도 없는 것이네. 나는 미국을 끌어들여 38선을 지키게 만들겠네.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공산당과의 방어선을 일본으로 물리려는 미국 정책을 바꾸게 해야겠어, 그러면...」
    갈증이 난 내가 냉수를 한모금 삼키고는 둘을 보았다. 이제 둘의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는다. 내 말을 머릿속에 넣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럼 대한민국은 국방비가 대폭 줄어들 뿐만 아니라 미국 원조를 집중적으로 받게 될 것이네, 그 동안에 우리는 교육, 경제, 그리고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를 굳히면 되는 것일세.」
    이것이 내가 40년 전부터 구상했던 신생 대한민국의 발전 청사진이다.
    나는 이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지금은 더더욱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