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한민국 ⑪

    해방 당시에 남한의 자작농 비율은 14%정도 였으며 농지의 86%를 소작농이 경작했다. 북한은 이미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공산당 정권이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으로 토지를 분배했지만 그 토지가 농민의 소유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유재산 개념이 없는 공산당 체제에서 농민이 무상으로 농지를 받는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농지는 다 국가의 소유였고 공동 경작 공동 분배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되었을 것이다.

    남한은 유상몰수 유상분재의 원칙을 세운 후에 1949년 4월에 국회에서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고 6월에 공포 하였으나 지주와 농민 측의 입장 차이를 조정하는데 시일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이 민주주의 체제의 본색이다. 협의하고, 토론한 후에 다수결로 결정을 하는 것이다.

    1949년 11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나는 경무대 본관 옆의 창고에 들어가 도끼와 톱을 챙겨 들었다. 문 앞에나와 날을 살펴보았더니 잘 갈아 놓았다.

    내가 가끔 사용하는 터라 비서들이 신경을 쓴 것이다. 창고 문 옆에 걸어놓은 낡은 모자를 한 개 집어 머리에 쓰고 도끼와 톱을 어깨에 메었더니 영락없는 농군이다.

    나는 휘적이며 경무대 뒤쪽 산으로 올랐다. 뒷산은 몇 년 동안 출입을 금지시켜서 말라죽은 나무가 많다. 이것이 내 운동이다.

    머리 식힌다고 경복궁 연못에 가서 낚시를 몇 번 했는데 큼지막한 잉어는 제법 잡히지만 도대체 운치가 없다.
    내가 어렸을 적 아버님을 따라 한강 지류에서 하던 낚시 맛이 나지 않는다.

    나는 지난주에 베다 만 소나무 둥치 앞에서 멈춰 섰다. 말라죽은 난무였는데 톱으로 넘어뜨리기만 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이놈이면 경무대에서 사흘은 땔감으로 쓰겠다.」
    손에 침을 뱉은 내가 톱을 고쳐 쥐면서 혼잣소리를 했다. 그때 산 위쪽에서 인기척이 났으므로 나는 머리를 들었다.

    지게에 톱과 납, 도끼까지 얹은 노인 하나가 산길을 내려오고 있다. 저고리 위에 조끼를 걸쳤고 바지에는 낡은 각반을 찼는데 일본군이 신던 군화는 앞이 벌어졌다. 일하러 온 노인 같다.

    「아니, 당신도 일 맡았소?」
    하고 노인이 버럭 소리치자 메아리가 짧게 울렸다. 그 순간 아래쪽 숲에서 불쑥 머리통 하나가 드러났다.

    낯익은 경무대 경호원이다. 경호원이 노인을 향해 입을 벌리려고 하는 것을 내가 서둘러 막았다.

    「자네는 멀찌기 가 있게.」
    경호원이 눈만 크게 떴으므로 내가 힘주어 말했다.
    「안 보이는데 가 있으라니깐.」
    「예, 각하.」
    하더니 경호원의 머리가 숲속으로 들어갔고 노인의 모퉁이를 돌아 다가왔다.

    70대쯤 되었을까? 머리칼은 희고 검은 얼굴은 가뭄에 갈라진 땅처럼 주름투성이다. 반쯤 벌린 입에는 치아가 절반쯤은 빠졌다. 다가온 노인이 나를 보았다.

    「나는 길은 뚫어 놓았는데 당신은 베어진 나무로 뭘 하는지요?」
    노인은 산길을 막는 나뭇가지와 나무 덩굴을 치운 것이다. 노인의 시선을 받은 내가 대답했다.

    「땔깜을 만들라고 헙니다.」
    「허, 어디 땔깜요?」
    「경무대」
    그러자 노인이 지게를 내려놓고 바위위에 앉았다.
    노인이 나를 같은 일꾼으로 본 것이다. 하긴 내 행색도 별로 나은 것이 없다.

    30년 가깝게 입던 헌 바지의 밑을 끈으로 묶었고 창고에 버려져있던 작업복을 걸쳤다. 신발도 낡았고, 모자는 옆이 헤어져서 머리칼이 나온다. 그때 노인이 말했다.

    「그래, 당신은 이박사 얼굴이나 보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