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한민국(20)

    1950년 5월 30일, 제2기 국회의원 선거일까지 대한민국의 역사는 만 2년도 안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첫 제헌의원 선거를 하고 그해 7월 17일에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공포 되었으며 7월 20일에 국회에서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196표 중에서 내가 180표, 김구가 13표, 안재홍이 2표였다.
    서재필이 1표를 받았다가 미국시민권자라 무효 처리가 된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8월 15일 건국을 선포했으니 내가 대통령이 된지도 1년 10개월 남짓이다. 그 1년 10개월이 나는 11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해방 후 건국까지의 3년이 마치 30년 같다.

    나는 불의와 타협한 적이 없다. 그것이 나를 독재자로 덮어씌우기에 적당한 것 같다.
    해방 후 지금까지 나는 독재를 한 적이 없다. 내가 70여년 추구해온 새 국가, 대한민국의 뼈대를 맞추기 위하여 초지일관 고집을 부렸다고 하면 맞는 표현이 될 것이다.

    첫째, 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하와이에 와있는 나를 민족분단의 원흉이라고 부르는 자가 있다면 그 배경을 살펴보기 바란다.
    틀림없이 그자는 공산주의자일 것이다. 나는 그런 자에게는 원수가 될 것이고 오히려 그것이 자랑이다.

    감히 말하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건국되지 못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견제자들의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대한민국을 건국했으며 1년 10개월 동안 대한미국의 기틀은 분명하게 굳혔다.

    그것은 국가보안법, 농지개혁법, 국민의무교육, 국방, 헌법에 남녀평등의 교육기회와 참정권을 부여함으로써 여성해방, 그리고 종교자유 등의 뼈대다. 이제 이것은 굳히고 다듬는 작업이 남아있을 뿐이다.

    「각하,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고 비서관 민복기가 다가와 보고했을 때 나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다. 민복기가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읽는다.

    「민국당 24석, 대한민국당 24석, 국민회 14석, 대한청년단 10석, 그리고 무소속이 126석입니다.」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민국당과 대한민국당의 패배라고 봐도 되겠다.

    누구는 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대한민국당이 71석에서 24석으로 줄어든 것이 내 패배라고 하지만 틀린 말이다. 한민당의 후신인 민국당도 79석에서 24석으로 줄었고 무소속이 1기 때는 85석이었던 것이 126석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야당에 뚜렷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내가 당수가 되어 공개적으로 창당을 했다면 대한민국당은 물론이고 민국당, 그리고 대부분의 무소속 의원을 흡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치하기가 가장 좋은 구도로군.」
    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더니 민복기가 시선을 주었다.
    민복기(閔復基)는 1913년생이니 당시 38세, 경성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서 해방 전까지 경성복심법원 판사를 지냈다. 작년에는 법무부 법무국장을 맡았다가 대통령 비서관이 되었다. 법관답게 사리가 분명하고 정도(正道)를 걷는 인물이다.

    내가 말을 이었다.
    「민주주의는 설득과 합의의 정치를 하는 것이야. 무소속이 많다는 것은 그 가능성이 많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민복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성모라면 진심으로 동의했을 것이다. 아마 민복기는 그 반대의 경우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던 것 같다.

    한숨을 쉰 내가 민복기에게 말했다.
    「이런 때는 마도로스 신이 있어야 되겠구먼.」
    「각하, 부를까요?」
    정색한 민복기가 물었으므로 나는 또 숨을 뱉았다.
    「아니야, 놔두게, 그만하면 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