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대한민국(23)

    그렇다. 그때에도 나를 비롯한 민주세력, 공산당의 실체를 확인한 반공세력, 그리고 일본군 출신 군 지휘관 등은 체제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우월감을 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을 파악하면 대한미국의 방심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역으로 김일성의 남침 야욕은 참으로 악착같았던 것이다.
    1949년 3월 7일,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승인을 요청한다. 그리고는 평양에 돌아와서도 소련대사 시티코프를 통해 끈질기게 남침 승인을 바란 것이다.

    중국 모택동에게 김일을 보내 남침 시 적극 지원 약속을 받고나서 다시 스탈린에게 요청을 하는 동안 대한민국에는 제주도 폭동, 여수, 순천의 반란, 국회의원 수십 명이 연루 된 남로당 간첩사건, 빨치산과의 내전, 독재자 이승만을 몰아내자는 국회의원들의 내각제 개헌 소동으로 평온한 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농지개혁 등 헌법에 명시한 국가의 틀을 갖췄으니 헌신적인 애국 인사와 각료의 공적이다.
    1950년 1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내의 조선족 14,000여명이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 되었다는 사실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김일성은 3일이면 옹진반도를 점령할 수 있고 전면전이 개시되면 단 며칠 사이에 서울을 점령할 수 있는데 왜 스탈린이 허가하지 않느냐고 시티코프에게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김일성은 스탈린의 허가를 얻는다.
    이철상의 보고대로 물자 지원은 소련이 하되 인적 지원은 중국이 하는 조건이다. 김일성은 북한만의 힘으로도 문제  없다고 장담을 했지만 스탈린과 모택동은 39살이 된 북한 지도자보다 조금은 더 신중했던 것 같다.

    「조만식 선생과 김삼룡, 이주하를 바꾸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서둘러 들어선 조병옥이 말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다. 이미 비서를 통해 들었지만 나는 물끄러미 조병옥을 보았다.

    1950년 6월 10일이다. 김상룡, 이주하는 남로당 간부로 지난 빨치산 소탕 작전 중에 생포되었다.
    조병옥이 말을 이었다.
    「그 두 놈보다 조만식 선생이 백배는 가치 있는 분 아닙니까?」
    갑자기 물건마냥 가치를 따지는 바람에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렇다. 조만식이 누구인가?

    고당(古堂) 조만식은 1883년생이니 당시에 68세가 되었다. 메이지대학 법학사 출신으로 1932년에 조선일보 사장을 지냈으며 해방이 되자 평남 건준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된 거인(巨人)이다.

    반공과 반탁을 북한에서 주장하다가 소련군정청에 의해 연금 당한 후에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던 터라 나는 김삼룡 백명을 모아서 바꿀 용의가 있다. 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셔와야지, 그런데 그자들이 갑자기 김삼룡과 이주하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은가?」
    한쪽이 너무 기울면 이상한 법이다. 지금까지 지하 깊숙이 감금시켰던 조만식을 갑자기 끌어낸 것도 수상하다. 그러자 조병옥도 머리를 기울였다.

    「저도 수상하긴 합니다만 제의를 거절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평화 공세라고도 합니다만.」
    「평화 공세라니?」
    「포로 교환으로 대한민국의 경계심을 풀어놓는다는 말씀입니다.」

    군정시대에 경무부장을 맡았던 조병옥은 반공주의자로 좌익의 전략에도 일가견이 있다. 조병옥이 말을 이었다.
    「어쨌던 서둘러 시행 하겠습니다.」
    조병옥이 조선일보 전무로 근무하던 1932년에 조만식은 사장이었다. 인연은 이렇게 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