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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돌을 맞이한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일제강점 36년을 겪으면서 한국어 속에 남아 있는 일본 한자어들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공화국, 입장, 역할, 식사, 상담, 수속을 비롯한 수많은 일본 한자어들을 신문, 방송을 비롯한 언론뿐만 아니라 국민 역시 아무렇지 않게 우리말로 인식, 사용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그 모진 조선어 탄압에도 사멸되는 위기는 다행히 모면했으나 오늘날의 한국어 속에 일본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한 서구화 과정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한자 조어(造語)가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언어지배의 상흔을 말해준다.
2002년 유네스코가 세계 언어 6,528개 중 거의 절반이 사멸 위기에 있다고 경고한 바 있는데 ‘힘없는 말’이 ‘힘있는 말’에 눌려 사멸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인 것 같다.
힘없는 말이 힘있는 말에 눌려 지냈던 36년간의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한국어가 수많은 한자어를 수용했고 또 오늘날까지도 그 일본말 찌꺼기에 한국어가 혼탁해진 예를 보더라도 일본 지식인이 말하는 고대사의 임나일본부설을 따른다면 오늘날의 한국어는 더 많은 일본말 찌꺼기로 만신창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임나일본부설이란 일본 사학계에서 말하는 고대 일본이 임나 즉 가야지역에 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설이다. 지배시기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야마토 정권)이 가야 7국을 평정했다는 369년에서 가야제국을 모두 멸망하는 562년까지 약 200여 년 간으로 보고 있다. 그 200여 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하고 특히 백제를 속국으로 다스렸다면 당연히 일본어(야마토어)가 지배어로서 군림하면서 당시의 한국어는 ‘힘없는 언어’로 사멸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사멸되었어야 할 한국어는 오늘에 이어지고 있으며 지배어로 군림했어야 할 일본어(야마토어)는 오늘의 한국어 어디에서도 그 흔적과 자치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역사적 문헌이나 기록, 문화적 정화, 일본에 산재한 유물이나 유적, 일본 각지에 널려 있는 수많은 한국과 연관된 지명에서 한반도 세력이 주력이 되어 일본을 이끌어 갔다는 역사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마땅히 한국어가 지배언어였을 것이고, 그 뿌리가 일본어 어딘가에 남아있다고 단정 지어 얘기해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흘러가버린 고대어를 추적하여 오늘에 재생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어가 지배어였다면 천 수백 년이 흘렀다 해도 그 기틀만큼은 오늘의 일본어 어딘가에는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다.
말은 사람의 그림자와 같아 사람과 더불어 살고 변하면서 사라지는 생명체이다. 힘없는 자, 힘없는 국가의 말은 힘 있는 자, 힘 있는 국가의 말에 밀려 세상에서 사라진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그렇게 조선어 말살을 기도했으나 조선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태곳적부터 이어온 한국어의 힘, 그리고 그 말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던 한국인의 한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으리라.저자는 외교관 생활 36년 동안 해외근무를 주 일본 대사관에서 시작하여 주 오사카 총영사관에서 마감했다. 오랜 외교관 생활을 하는 동안 각국의 언어를 접하면서 세계 언어의 생태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러면서 이웃하는 나라끼리의 언어는 같거나 닮는다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라는 것을 깨닫는다. 예컨대 유럽언어에서 북부지방인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영국이 한 묶음이 되어 게르만 언어(Germanic) 그룹을 형성하고, 중남부지방인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루마니아 역시 한 묶음이 되어 이탈리아 언어(Italic) 그룹을 형성하여 제각각 같은 어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한일 양국의 역사로 보아 그렇게 가깝고 긴밀한 관계였는데도 양 언어 간의 관계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이 알타이(Altai) 어계(語系)를 주장하는 것 외에는 대체로 양 언어가 각자 독자적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에 의구심을 품는다.
유달리 언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해외 근무지에서 여러 외국어를 접하면서 언어의 생성 그리고 언어가 생활에 끼치는 영향이나 문화의 형성과정 등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오랜 일본생활을 통해 일본어의 뿌리가 한국어에 있음을 몸소 체험하였다. 양 언어의 형태나 구문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고유어에서 같은 어족에 속한다고 할 만큼 유사어가 충분치 않아 동계어일 수 없는 주장에 필자는 직접 같은 어족이라는 근거들을 찾기 위해 일본말 속에 감춰진 한국말을 하나하나 캐내기 시작한 지 20여 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천착해 온 노력과 연구와 탐색의 결과로 2005년 가을, <일본말 속의 한국말 - 한일 고유어 비교사전>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저자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언어학상의 어족 연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양국 간의 역사적인 진실을 캐고 이를 토대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미래의 역사를 올바르게 설계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그의 역사를 바로잡으려고 하는 노력은, 한반도 한국인은 천황 중심으로 이루어진 일본 역사의 무대에 조금도 근접할 수 없었고 따라서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다는 역사인식, 즉 일본 고유의 황국사관이 뿌리 깊게 깔려 있는 일본의 의식을 깨우치게 하고자 하는 것도 있다.
일본의 학자 대부분이 지금도 야마토(大和) 정권이 신라를 정벌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한반도를 지배하였다고 주장하는데 그 한반도 지배설이 단순한 역사기록으로 끝나지 않고 후에 그들이 의도한대로 일본의 대(對)한반도 종주국사관(宗主國史觀)으로까지 확립되어 일본 역사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한 역사관은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 구한말의 정한론자들에 의한 한일병합을 정당화시키는 역사적인 근거로 삼았으며, 급기야는 한반도 나아가 만주까지도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둠으로써 그들의 오랜 세월에 걸친 영토적 야욕을 일시적이나마 충족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천 수백 년에 걸친 주장을 그대로 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자는 그 저의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고 한다.
이 책은 한일 고대어 비교 사전의 형식을 취했으며 표제어를 일본어 오십음도(五十音圖)의 순서에 따라 배열하였고 그 다음 청음(淸音), 탁음(濁音)의 순으로 하였다.
들어가기에 앞서 언어학에서는 언어 간의 관계를 밝히는 데에는 음운대응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래서 본서에서는 한일 양 언어 간의 이음관계가 우연이나 자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해설편’에서 음운대응의 법칙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표제어와 그에 대응하는 한국어가 서로 이어지는 관계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였다. 또 ‘사전편’에서는 양 언어가 공유하는 형태론상, 통사론상 즉 문법론상의 유사성을 음운, 의미, 어휘로 제시하였다.
기파랑 펴냄, 544쪽, 2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