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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으로 사건은 시작됐다. 지난 1979년 12월 12일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합수부) 수사관들이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충돌은 다음날 아침 사태가 정리될 때까지 숨가쁜 상황의 시작이었다. 경복궁 수경사 30단에 모여 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노태우 9사단장 등과 참모총장 연행에 항의하는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격돌은 금방이라도 피를 볼 것 같았다.
결국 사태는 나중에 신군부로 불린 전두환 사령관 측의 승리로 마감됐다. 이 당시 승자의 편에서 쓰여진 12.12 사건의 진상은 1995년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 뒤집힌다. 승자와 패자가 서로 자리를 바뀌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옮겨 앉는다.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일까.
12.12사건은 아직 진행 중이다. 그 의미를 두고 ‘신군부의 정권 찬탈 기도’라고 정의하기도 하고 “쿠데타가 아닌 정당한 수사권 행사였다”는 평가도 있다. 문민정부 이후 12.12사건은 대부분 ‘신군부의 반란’으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같은 평가 역시 ‘승자의 시선에서 본 기록일 뿐’이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뉴데일리는 30년 전 12.12사건의 주역이었던 허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과 신윤희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감사를 만났다. 이들은 이야기한다. “쿠데타가 아니었다”고. 뉴데일리는 이들에게 들은 그대로를 3회로 나눠 연재한다.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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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윤희 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 뉴데일리 " title="▲ 신윤희 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 뉴데일리 ">
오후 7시 영내에 있는 아파트로 퇴근을 했다. 샤워를 마치고 식탁에 앉은 것이 7시 반쯤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수경사 상황장교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부단장님! 큰일 났습니다. 우경윤 대령하고 권정달 대령이 진급에 불만을 품고 참모총장을 납치했습니다. 헌병단 5분대기조를 한남동으로 출동하라고 합니다.”
뒤에 확인된 사실이지만 사령부 상황실은 허삼수 대령을 권정달 대령으로 잘못 전달했다. 헌병단에 출동준비를 지시하고 신윤희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은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부대에 도착하니 모든 출동준비가 완료돼 있었다. “단장님께 출동 사실을 보고하게.”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은 그날 진급예정자로 발표돼 장태완 사령관과 외부에서 저녁만찬을 하고 있었다.
5분대기조를 이끌고 한남동 총장공관으로 향했다. 공관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현장엔 10.26 이후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부)에 배속된 33헌병대가 먼저 나와 있었다. ‘진급에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총장을 납치했다는데 왜 합수부 배속 헌병들이 먼저 나와 있을까?’ 마침 33헌병대장 최석립 중령이 보였다. 다가가 물었다. “선배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잘 모르겠어.”
33단장인 김진영 대령이 나와 있어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단장님, 우경윤 대령하고 권정달 대령이 진급에 불만을 품고 총장을 납치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것입니까?” 김 대령은 “납치가 아니고 합수부에서 김재규와 연관이 되어 있는 참모총장을 수사하기 위해서 연행한 것 같다. 나도 그것 밖에는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감이 잡혔다. ‘아아, 이게 납치된 것이 아니라 합수부에서 수사 차 연행한 것이구나.’
"안에 있는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체포 및 사살해라.”
조금 뒤 수경사령관이 현장에 도착했다. 신윤희 부단장은 간단한 병력 배치 등 현황보고를 했다. 사령관은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신 중령. 지금 즉시 저 안쪽으로 공격해. 안에 있는 놈들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체포 및 사살해라.” 신 중령은 짧은 순간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어쨌든 우군끼리의 살상은 막아야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서로 맞부딪치면 쌍방이 피해가 큽니다. 여긴 맡겨두시고 사령관님은 부대에 들어가셔서 부대를 지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령관을 동행하고 있던 육군 본부사령 황관영 장군이 거들었다. “신 중령 말이 옳습니다. 부대지휘가 중요하니까 복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태완 사령관은 사령부로 돌아갔다.
신윤희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의 기나긴 12.12의 밤은 이렇게 시작됐다. 신 단장은 몇 시간 후 자신의 상관인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는 악역을 맡게 된다. 그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 역시 당시로는 꿈도 못 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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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당시 합동 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자료사진 " title="▲ 1979년 당시 합동 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한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자료사진 ">
‘왜 상관인 수경사령관을 연행했느냐’는 질문에 신윤희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 감사(당시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은 “당시 상황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사령관의 기세가 정말 경복궁에 포사격을 할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장태완 사령관이 장교들을 집합시키더니 흥분한 말투로 ‘지금부터 내가 강력하게 지시한다. 지금 30단(경복궁 수경사 30단을 말함)에 전두환 노태우 김진영 장세동 이 놈들이 모여서 작당 및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 이 놈들은 적이다. 반란자다. 지금부터 내 명령에 따라서 자기 지휘관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살해라’고 말했어요. 경복궁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과도 지근거리에 있는 중요한 곳입니다. 게다가 포사격이라니요? 장 사령관은 당시 탱크중대에도 출동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 감사에 따르면 장 사령관은 계속 흥분된 상태로 합동수사본부 요원과 보안사 요원, 30단 병력은 모두 적이니 야포와 전차를 동원해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사령부에 있는 참모들의 갈등도 많았어요. 그런데 밤 11시 반쯤 돼서 30단에 있던 헌병단장으로부터 민간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신 중령, 지금 내가 아주 중요한 명령을 내리겠다. 내가 지금 여기 와서 보니까 합수부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김재규 사건과 관련이 되어있는 정 총장을 연행하는데 장태완 장군이 정당한 수사행위를 병력을 동원해서 방해하고 있다. 양쪽의 병력이 부딪치면 쌍방간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니 장태완 사령관을 체포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 감사가 망설이고 있는데 느닷없이 사령부 인사참모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이미 단장으로부터 사령관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자신을 체포하거나 위해행위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을 졸이며 만난 인사참모는 흥분된 어조로 ‘신 중령. 이거 큰일났다. 지금 사령관이 이성을 잃고 경복궁에 포사격을 하고 전차사격을 하라고 하는데 대통령이 있는 경복궁에 어떻게 사격을 할 수 있겠나. 쌍방 간에 불상사가 일어나면 큰일이다. 헌병단에서 어떻게 손을 써달라. 충돌하면 국가가 망한다. 사령관은 무조건 저쪽에 공격하라고 명령을 하는데 헌병단에서 어떻게 손을 써 달라’고 되레 부탁을 했다.
"김재규와 연관 있는 정 총장을 연행 조사는 당연"
“그때는 참 그 인사참모가 미웠습니다.” 신 감사는 인사참모에게 ‘당신들, 참모들이 뭐 하는 거냐? 사령관을 설득해야 될 것 아니냐.’ 하고 공박을 했다. 인사참모는 ‘지금 그럴 상황이 못 된다. 사령관이 남의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다. 저 양반 지금 이성을 잃고 있다’며 신 감사에게 하소연을 했다.
잠시 뒤엔 정보참모가 그를 찾았다. 같은 얘기였다. ‘신 중령. 이거 큰일 났다.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령관이 전차로 밀어 붙일 것 같은데 어떤 조치를 취해야 되지 않겠나’였다. “조금 있으니까 이번에는 전차대대장이 찾아왔어요. 전차대대장은 육사 21기로 저와 동기였는데 다급하니까 하소연도 하고 싶고 또 저와 상의를 하고 싶어 올라왔던 것 같습니다. 그가 심각한 어조로 ‘신 중령. 나는 이럴 때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해요. 그래서 ‘일단 사령관의 명령이니까 알겠다고 하고 시간을 끌어서 냉각기를 갖는 수밖에 없다.’ 고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겪으며 직속상관인 헌병단장의 명령에 따라 사령관을 체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신 감사는 그 어려운 결심의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사령관이 계속 병력과 야포 또는 전차를 앞세워 경복궁과 합수부를 공격하라고 명령하는데 만약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 군끼리 내전까지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국가가 파멸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
둘째, 합수부에서 김재규와 연관이 있는 정 총장을 연행 조사하는 것은 당연하고 정당한 수사행위인데 사령관이 이를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된다는 것. 셋째, 10.26 이후에 전후방 각 부대에서 찾아온 장교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정 총장은 조사를 받아야 된다 하는 것이 군 전체의 여론이었다는 것이었다.
신 감사는 “장 사령관이 ‘12.12와 나’라는 책에서 밝혔듯이 사령부 전 장교 450여 명 중 60명만 사령관을 지지했을 뿐 390여 명 다른 장교들은 사령관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은 사령관의 행동과 지시가 부당하고 무모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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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12월12일 밤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의 긴박했던 순간을 지켜 본 보안사 정문의 차량통제기록부 일부분. ⓒ 자료사진 " title="▲ 1979년12월12일 밤 11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의 긴박했던 순간을 지켜 본 보안사 정문의 차량통제기록부 일부분. ⓒ 자료사진 ">
어려운 결심을 한 신 감사는 실행에 옮긴다. 자정을 넘긴 12월 13일 새벽 2시 50분 신 감사는 중대장 3명과 기동대장 1명 그리고 정보과장 등 장교 5명과 병력 60명을 인솔해 사령관실로 올라갔다. 사령부 현관에 도착하니까 본부대 병력 수십 명이 배치돼 있었다.
‘여기 본부대장 없어?’라고 소리치니 본부대장이 현관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본부대장, 여기 주변에 대한 경비를 우리가 인수받으라고 사령부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너 연락받은 거 없냐?”하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본부대장은 ‘아, 저 연락받았습니다. 저희 병력을 철수하겠습니다’라며 자기 병력을 철수했다. 충돌의 위기를 넘긴 순간이었다.
사령관실 입구에 가니까 육군본부에서 온 장군들의 부관과 보좌관 10여 명의 장교들이 전부 권총을 차고 복도에서 서성대거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리를 피하라’고 눈으로 신호를 하니 모두들 한쪽으로 비켜섰다. 중대장 2명과 정보과장 등 3명이 사령관실에 들어갔다.
“수행인원을 통제하고 뒤따라 사령관실에 들어가는데 ‘탕’ 하고 총소리가 나요. 보니까 하소곤 장군이 옆구리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정보과장한테 지시해서 후송시키고 나니 장태완 사령관이 신 감사를 바라보았다.
“야 신 중령.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죄송합니다. 국가의 위기를 맞아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사령관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러지 장 사령관은 ‘그래. 가자’ 하고 아무 소리 안하고 따라 나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그날 새벽부터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물을 몇 주전자나 들이켰는지 모릅니다.”신 감사는 “군인은 여하튼 직속 상관의 명령을 따라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만약에 잘못되어 처형을 당하거나 법을 어겨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더라도 직속상관하고 운명을 같이 해야 한다는 신념이다. 신 감사 생애의 가장 길고 긴 밤은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