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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뚫은 태양광선 피라미드
인류사상 최대의 신비가 잊고 있던 옛 친구처럼 우리 앞에 이집트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기자Giza의 세 피라미드이다. 카이로 중심가에서 남서로 13㎞, 나일 강 서안 사막지대의 석회암 언덕에 세 피라미드가 옛 영광을 자랑하듯 웅장한 모습으로 나란히 서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석조건축물이다.
세 피라미드는 누구나 어릴 때부터 사진이나 그림으로 틈틈이 보아 왔다.
그래서 그런지 피라미드를 실제로 보는 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옛 친구를 만나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막상 가까이서 피라미드를 만나보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기하학적인 간결한 아름다움에 놀랍다 못해 완전히 압도되고 만다. 그토록 오랜 세월 온갖 풍상을 겪었음에도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못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하기야 혼자서 대피라미드 안에 들어갔다 나온 나폴레옹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랬던 것처럼 그 신비로움에 심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나폴레옹은 유명한 피라미드 전투에 앞서 병사들에게 “피라미드 위에서 4천년의 역사가 제군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외쳐 병사들을 고무시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폴레옹은 피라미드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이집트 원정은 실패했다.
나폴레옹, 대피라미드 안에 들어가 벌벌 떨어 -
파라오, 무덤에서 태양빛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신비한 것은 피라미드만이 아니다. 고대 이집트 문명 자체가 많은 수수께끼를 지닌 신비에 쌓여 있는 문명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비한 것이 바로 피라미드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옛날에 천문·점성·지질·수학·기하·토목·건축·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문과 지혜를 총 동원하여 만든 것이 피라미드이기 때문이다.
피라미드는 옆면이 세모꼴이 되도록 돌을 비스듬히 쌓아올려 꼭대기에서 만나도록 하여 전체적으로 정사각뿔 모양이 되도록 만든 석조기념건축물이다. 그러나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고유의 건축형태는 아니다. 이러한 형태의 건축물은 수메르·아시리아·바빌론·멕시코 등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갖가지 이유로 건조되었다. 다만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무덤이라는 것이 다른 지역의 피라미드와 다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피라미드를 정사각뿔 모양으로 만든 것은 구름을 뚫고 내려오는 태양광선을 형상화 한 것이다. 옆면을 경사지게 만든 것은 파라오가 죽으면 영생하기 위해서 하늘로 태양광선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이처럼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재생·부활·영생의 사생사관과 태양신 숭배의 종교관의 산물이다. 태양에 대한 신앙이 파라오에 대한 신앙으로 연결되었던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는 바로 파라오의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세 피라미드를 세웠을 당시만 해도 이 일대는 황갈색 모래뿐인 사막지대로 피라미드와 그 주변의 무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로 올라간다'는 단어 '메르' 글자는 △
7세기 말에 이곳에 마을이 생겼을 때 아랍인들이 「강 건너 있다」는 뜻으로 「기자」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때만해도 피라미드에 가려면 배로 나일 강을 건너 당나귀를 타고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아니면 바로 피라미드 아래까지 와있는 운하를 이용하여 배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랬던 기자가 지금은 카이로 교외에 자리한 이집트 최대의 관광지로 변모해있다. 「
피라미드」의 원래 이름은 메르Mer였다. 고대 이집트어로 「하늘로 올라간다」는 뜻이며 히에로글리프로는 △으로 표현했다. 피라미드라는 이름은 그리스인들이 늘 먹는 사각뿔 모양의 빵 퓨라미스pyramis와 비슷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다.
필론의 '세계7대불가사의'중 유일하게 남은 불가사의
4천 5백여 년 전, 까마득한 그 옛날에 이렇게 거대한 석조건축물을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어 고대 이집트 문명의 최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것이 신비감을 더해주어 피라미드를 더 유명하게 만들고 있다. 그 신비함을 증명이나 하듯이 기원전 2세기 무렵 비잔티움의 수학자 필론이 소개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대피라미드뿐이다.
왜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파라오의 무덤·보물·보관창고·곡물 창고·천체관측소·죽은 파라오의 미라의 임시보관소·해시계 심지어는 고대 이집트 이전에 있었을지도 모를 초고대 문명의 유산 따위 여러 설이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피라미드는 파라오의 무덤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많은 돌을 어떻게 운반해 와서 그렇게 높이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대략 이러하다. -
터 닦기 10년, 돌 운반 건축에 20년
피라미드는 주로 농한기에 연 10만 명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노예들이 아니라 숙련된 기술자와 농부들이었다. 돌을 나르기 위해 길을 닦고 나일 강 기슭에 부두를 만들고 피라미드를 세울 터를 닦는데 10년, 돌을 캐고 다듬고 운반해 와서 쌓아 올리는데 20년이 걸린 것으로 본다. 제일 먼저 거대한 석조건축물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바위 언덕에 피라미드를 세울 터를 정했다. 그 다음에 별을 보고 네 면이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하도록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남동 가까이에 있는 채석장에서 나무나 청동으로 만든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돌을 캐고 다듬었다. 그 돌들을 삼나무의 열매기름을 부어 만든 길 위로 돌을 실은 통나무로 만든 썰매를 사람이 직접
밀거나 파피루스로 만든 밧줄로 끌어서 건조 현장까지 운반해왔다.
석회암은 카이로의 모카탐 언덕에서, 피라미드의 겉에 입힌 흰 석회석은 카이로 남부 투라Tura에서 가져왔다. 거대한 화강암은 아스완에서 나일의 강물이 불어났을 때 배로 운반해 왔다. 자갈로 만든 완만한 비탈길에 굴림대를 깔고 그 위로 돌을 실은 나무썰매를 끌어 올려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피라미드는 건조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과연 그렇게 해서 그토록 높고 큰 석조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왕조시대 140기 건조, 왕비는 위성 피라미드로
왕조시대에 약 140기基의 피라미드가 건조되었다. 대부분이 고왕국시대에 건조되었다. 그래서 이 시대를 「피라미드시대」라고 부른다. 피라미드는 왕도 멤피스를 중심으로 남북 90㎞에 이르는 「피라미드 지대」라고 불리는 사막지대에 모여 있다. 이집트에 약 90기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는데 37기가 파라오의 피라미드이다.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15기 정도이며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기자의 세 피라미드이다.
세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2대 파라오 쿠푸, 4대 파라오 카프라, 5대 파라오 멘카우라2514~2486>의 피라미드이다. 이들 피라미드에는 「해가 뜨고 지는 곳」, 「가장 위대한 곳」, 「가장 신성한 곳」이라는 특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 각 피라미드는 북동에서 남서로 「기자의 대사선」을 이루며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주변에 6개의 작은 왕비의 위성 피라미드를 비롯하여 왕족과 귀족들의 마스타바들이 있고 그 곁에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모습을 한 대스핑크스가 피라미드를 지키고 있다.
'파노라마 포인트'.... 피라미드 발달순서 따라 관광
세 피라미드에서 북서로 조금 떨어진 곳에 「파노라마 포인트」라고 불리는 모래 언덕이 있다. 그곳에 가면 세 피라미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거기서 대스핑크스까지 낙타나 마차를 타고 사막을 내려가면서 피라미드 남쪽 면의 아름다운 모습을 즐길 수 있다.
피라미드의 관광은 피라미드의 발달 순서를 따라 먼저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인 계단 피라미드, 메이둠의 무너진 피라미드, 다슈르의 최초의 정사각뿔 피라미드인 굽은 피라미드와 붉은 피라미드, 그리고 기자의 세 피라미드를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기자의 대피라미드에 들어갈 수 있는 관광객 수를 제한하고 있는데다 피라미드 안이 매우 습하고 무덥다. 그러기 때문에 오전에 세 피라미드를 보고 오후에 나머지 피라미드를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