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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마지막 왕 敬順王은 後백제의 견훤이 경주로 쳐들어와 신라의 경애왕을 죽인 뒤 왕으로 세운 사람이다. 경순왕 9년(서기 935년) 왕은 나라를 고려 王建에게 바치려고 회의에 붙였다. 마의태자는 이렇게 말했다(三國史記).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天命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충신, 義士와 함께 民心을 수습하고 스스로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후에 말 것인데 어찌 1000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줄 수 있습니까."
이에 경순왕이 말했다.
"이와 같이 외롭고 위태로운 형세로는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하지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하여 무고한 백성만 간과 뇌를 땅에 바르는 것이니,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간과 뇌를 땅에 바른다'는 말은 原文에 '肝腦塗地'라고 적혀 있다. 무고한 백성들이 전쟁에 휘말려 거리에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처절하게 묘사한 문장이다. 경순왕의 말에서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못하다'는 말이 흥미롭다. 나라를 지킬 만큼 강하지도 못하고 나라가 폭싹 망해버릴 정도로 약하지도 못하니 王族들이 구차한 목숨을 근근히 이어가면서 백성들만 고생시키고 있다는 뜻이다.
경순왕은 후계자인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시하고 고려 王建에게 항복할 뜻을 전했다. 그해 11월에 王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주를 떠나 송도(개성)의 태조에게 귀순한다. 마차, 牛車, 말이 30여리에 잇달아 도로가 막히고 구경꾼이 담장과 같았다. 경순왕은 王建으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경주를 食邑으로 받았고 경순왕 백부의 딸을 왕건에게 시집 보냈다. 여기서 난 사람은 고려 현종의 아버지가 된다.
신라의 귀족들도 고려에서 重用되었다. 경순왕이 싸워서 망하지 않고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과 귀족들이 亡國의 피해를 보지 않고 오히려 득을 본 셈이다. 삼국사기의 著者 金富軾은 이렇게 평했다.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 못한 일이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때 만약 죽음으로써 힘껏 싸워 항거하다가 힘이 꺾이고 형세만 궁급함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종족은 멸망되고 무고한 백성에게 해만 끼쳤을 것이다. 현종은 신라의 外孫으로 寶位에 올랐고 그 후 大統을 이은 자가 모두 그 자손이었다. 어찌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나라가 망하면 왕족과 백성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東西古今의 사례에서 보는 바이다. 新羅처럼 싸우지 않고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왕이 스스로 결단하여 귀순함으로써 그 스스로는 물론이고 귀족과 백성들을 살린 예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고구려는 지배층의 自中之亂, 백제는 지배층의 부패가 심각했다. 두 나라가 싸워서 망한 것은 一見 장렬하게 보이지만 그 후유증은 當代의 사람들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싸워서 망하든지 끝장을 확인할 때까지 가서 망하면 망하는 쪽에서 남는 것은 없다. 따라서 접수하는 쪽에서는 물건과 노예를 줍듯이 하니 예우해줄 이유가 없다. 新羅 경순왕은 군사적, 경제적 餘力이 있을 때 귀순하니 王建으로서도 대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신라 지배층이 고려의 지배층으로 轉入함으로써 신라사람들은 고려시대에도 대접을 받으면서 살았다. 邊太燮 교수는 '韓國史通論'에서 고려 성종 때 국가체제가 확립되었을 때의 지배세력은 "지방호족 출신으로 중앙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頭品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고 썼다. 成宗 때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데 主役이었던 유학자 崔承老는 신라 6두품 출신 귀족이었다. 그는 28개조의 개혁안을 成宗에게 제시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와 유교 정치이념을 확립했다.
북한 金正日은 이런 경순왕에게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북한체제가 망하고 김정일 집단이 斷罪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이다. 여력이 있을 때 손을 들 것인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되었을 때 항복할 것인가의 선택만 남았다. 김정일이 대오각성하여 대한민국에 귀순한다면 적어도 그와 親族, 그리고 측근들의 안전은 보장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는 그의 운명이 의자왕이나 차우세스쿠보다 나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이든 조직이든 헤어질 때, 죽을 때, 해산할 때, 망할 때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삼국통일로써 한민족이란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 공동체의 무대를 한반도에 설정했던 신라는 망하는 것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라정신 속에 있는 실용정신, 자존심, 그리고 관용과 지혜 덕분일 것이다. 에밀레鐘에 새겨진 銘文에 나오는 '圓空神體'란 말이 새삼 생각난다. "둥글고 속이 빈 것이 하느님의 본성"이라는 의미이다. 원만하고 겸허하면서도 강력한 존재가 신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