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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과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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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대법원장의 어느 강연을 전해 듣자니 그와 안철수 교수는 닮은 데가 있어 보인다.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입장을 거론하는 점에서 그렇다. 이 말은 그러나 나이브하고 아마추어적인 데가 있다. 얼핏 듣기엔 그럴 듯하지만 따지고 들자면 너무 단순하다.
“좌도 우도 아니다”가 그런대로 성립할 수 있는 경우로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선, 인간은 다양성, 모순, 발랄함, 생명의 약동을 내포한 ‘갇힐 수 없는’ 존재 그대로 봐 줘야지, 좌다 우다 하는 사회과학적 잣대로만 재단(裁斷)해선 안 된다고 하는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cal anthropology)’의 관점이다.
둘째는, 좌를 혹시 극단적 사회주의로 치고 우를 혹시 완강한 권위주의로 칠 경우(이건 물론 정교하지 않은, 매우 투박한 설정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나는 그 둘 다 아니고 자유주의자, 민주적 보수주의자, 중도 좌우, 사회민주주의자” 정도라고 할 때의 “좌도 우도 아니다”란 자처(自處)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입장 같은 것들이 끝까지 일관성을 입증하려면 그야말로 끝까지 제3의 독립변수로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느 한 쪽에 등을 대고 다른 한 쪽에 악수하자며 손을 내밀면 그 "좌도 우도 아니다“라는 위상은 지도상에서 지워진다.
안철수 교수는 박원순 씨의 손을 들어주고 한나라당이 역사의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그가 제3의 독립변수이기를 종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용훈 전임 대법원장은 안철수 씨의 이런 선택을 여전히 불편부당(不偏不黨)이라고 보는지? 생각은 “좌도 우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행동은 ‘제3’ 아닌 둘 중 하나를 분명하게 편들어 준 게 아니란 말인가?
이처럼, 이용훈 전임 대법원장의 “좌도 우도 아니다”에 관한 설명의 논리는 엄밀성을 결하고 있다. 양쪽의 프로페셔널 전사(戰士)들이 뛰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장에서 “좌도 우도 아니다”라는 입장은 물론 지식인의 머릿속 관념과 추상(抽象)으로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고 싶으면 끝까지 선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선택을 해놓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고 하는 것은 웃기지 않는가?
류근일 /본사고문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