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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에서 홍위병(紅衛兵)들에게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한 경극 배우 시투(장풍의 분)는 공개 자아 비판을 하던 중 동료 배우 두지(장국영 분)의 동성애 전력과 아편 중독 사실을 폭로하고 만다. 이에 두지가 "시투의 아내 주샨(공리 분)은 홍등가의 창녀"라고 맞받아치자 시투는 "자신은 한 번도 주샨을 사랑하지 않았다"고 밝히며 화살을 피해간다. 충격을 받은 주샨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영화는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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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카이거 감독이 연출한 '패왕별희'는 60년대 '문화혁명(文化革命)'이 중국 전역을 휩쓸 당시 활동했던 경극 배우들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영화다.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홍위병들은 '무산계급(無産階級)'을 압박하는 자본주의 문화와 낡은 인습을 타파하기 위해 오래된 유적과 유물, 문화재들을 닥치는대로 부수고, 수많은 문화 예술인들을 '반혁명인사'로 매도해 공개 자아 비판을 강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척결 대상이었던 경극 배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시투와 두지는 자아 비판(인민재판) 도중 '살기 위해' 서로의 치부와 과거를 폭로하는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영화 속 시투와 두지처럼 '문화혁명' 시기, 홍위병들에게 끌려온 많은 예술가들이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수백만명이 모진 탄압을 받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시진핑을 배우자" 사상·업적 교육 열풍..新문화혁명?
문화혁명은 69년 공식 종료됐고, 76년 모택동이 사망하면서 혼돈으로 얼룩졌던 문화혁명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런데 최근 빈부 격차 등 경제 발전으로 인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중국 사회 곳곳에서 과거 부르주아 타파 운동을 벌였던 문화혁명 시기를 그리워하는 조짐이 일고 있어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지난 5월 '56개의 꽃(56朶花)'이라는 중국의 관영 걸그룹이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불렀던 혁명가와 시진핑 주석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 논란을 일으키는가하면, 중국의 포털 사이트에선 "자본주의를 반대하고 온전한 사회주의로 돌아가자"는 토론 모임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중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反자본주의 시위'도 갈수록 거세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문화혁명 사상의 요체를 추종하는 이른바 '문혁 재현 운동'과는 다르지만, 문화혁명 때처럼 사람들의 사상·지식·문화를 통제하려는 움직임은 중국 공산당에서 먼저 일어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시진핑 우상화 작업이다.
시진핑 주석은 올해 초 장차관급 고위간부 대상 포럼에서 문화혁명을 '중국과 세계를 격리시킨 10년 동란'으로 정의내리며 문화혁명을 재평가하자는 일련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시진핑은 문화혁명 당시 시골 마을로 '하방(下放)' 당해 7년간 토굴집에서 생활했던 대표적인 피해 인사다. 하지만 지금 중국에선 시진핑이 숨어 살았던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 마을을 '성지'로 만들고, 이곳을 방문하는 공산당원이나 관람객들에게 시진핑의 사상과 업적을 교육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모택동의 우상화 작업으로 비참한 시간을 보냈던 시진핑이 이제는 중국인들의 새로운 우상으로 떠오르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 -
◆ "애국심 인증하라!" 쯔위 저격한 네티즌, 알고보니?
시진핑 주석에 대한 '숭배 풍조'와 더불어 이른바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중화(中華) 국수주의'도 '문혁 재현'의 우려를 낳고 있는 요소 중 하나다.
최근 타국과 영토 분쟁이 빈번해진 중국은 지명도가 높은 연예인들을 ▲중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환기시키고 ▲자국민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
일본과 센카쿠 열도 분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그랬고, 지난 대만 총선 때에도 '反대만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에 중화권에서 활동하는 유명 인사들이 톡톡한 역할을 했다.
걸그룹 트와이스의 쯔위(周子瑜)는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대만 국기를 흔드는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졸지에 '대만 독립주의자'로 몰리자, 유튜브에 사과 동영상을 올리는 해프닝을 빚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과 대만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같은 쯔위의 모습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악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화권에서 인기가 높은 스타들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SNS에 있다. 친중국 연예인 황안처럼 노골적으로 '홍위병'을 자처하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음지에 숨어 익명으로 연예인들에게 애국심을 강요하고 있다.
쯔위가 대만 국기 논란에 휘말릴 당시 수많은 중국 네티즌들은 쯔위가 등장하는 기사마다 악플을 퍼붓고, 쯔위를 모델로 기용한 회사에 민원을 제기하는 등 전방위로 압박을 가했다.
그런데 쯔위의 사과 동영상이 올라오고, "오늘로서 우리는 전도양양한 중국의 미소녀를 얻게 됐다"는 '환구시보(環球時報)'의 논평이 공개되자, 수일째 기승을 부리던 '중국발 악플'도 덩달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영유권 분쟁 등 중국에 민감한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애국심을 인증하라'고 선동하는 열혈 네티즌의 배후에 "중국 공산당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들 음모론자들은 '중국공산주의청년단(中國共產主義青年團·이하 공청단)'을 '국수주의 여론몰이'의 몸통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공청단은 최근 자신들의 공식 웨이보 계정을 통해 배우 겸 감독 자오웨이(趙薇)가 연출한 영화 '다른 사랑은 없다(沒有別的愛)'의 주연 배우인 대만 스타 다이리런(戴立忍)이 과거 홍콩 내 반중시위(우산혁명)를 지지하고 파룬궁 산하 매체와 인터뷰를 한 점을 들어 "반중 성향을 지닌 배우"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공청단은 다이리런이 출연한 영화 3편을 공개한 뒤 노골적으로 보이콧 운동을 선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공청단의 잇단 폭로로 다이리런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다이리런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도 않고 반중 성향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 '안티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제작진은 다이리런을 영화에서 전격 하차시켰다.
또 연출자 자오웨이(趙薇)는 "우리는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되며 개인보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이 우선돼야 한다"는 '애국 인증' 발언을 웨이보에 올리기도 했다.
공산주의 사회제도 구현을 목표로 1920년 5월 발족한 '공청단'은 문화혁명 당시 해산됐다가 1976년부터 조직을 재정비, 활동을 재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아 14세 이하 유소년 조직인 중국소년선봉대(中国少年先锋队)를 관리하며 사실상 공산당의 고급 인력 양성소 역할을 하는 '공청단'은 그동안 숱한 고위직 인사들을 배출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중국공산당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과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을 들 수 있다. -
◆ 공청단, 中공산당 지령 받고 온라인 여론몰이?
최근 남중국해 판결에서 중국이 패소한 이후 중화(中華) 사상이 깃든 '국수주의 열풍'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모습이다. 중국 사정에 밝은 소식통들은 이같은 움직임의 중심에 바로 '공청단'이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청단'이 애국심을 부추기는 여론을 조성하면, 환구시보 같은 정부 기관지들이 이를 일반적인 '대중 민심'이라고 보도해 공산당의 방침대로 국민 여론이 형성되도록 한다는 것.
중화권 연예인들이 '남중국해 판결'을 성토하는 글을 웨이보에 올리면 곧바로 공청단의 웨이보 계정에 이들 연예인들의 이름이 차곡차곡 올라오는 것도 공청단이 '온라인 여론부대'를 이끌고 있음을 드러내는 방증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자신의 웨이보에 "중국은 한점도 작아질 수 없다(中國一点都不能少)"는 글을 올리고 있는 연예인들은 에프엑스의 빅토리아 같은 한류스타들을 포함, 수백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해당 발언과 함께 남중국해의 90%가 중국의 영해로 표시된 그림을 공유하는 등, 상설중재재판소(PCA)의 남중국해 판결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은 고문헌에 구단선(九段線)이 기록돼 있다면서 구단선 안쪽 해역의 대부분이 중국의 영토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상설중재재판소는 "'구단선'은 단지 중국의 자료일 뿐, 타국과의 영토 문제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될 수는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문제는 이같은 '억지 주장'에, 현재 중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 연예인들도 동참하라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는 점이다.
후난위성TV 드라마 '무신 조자룡'에 출연하며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소녀시대의 윤아가 바로 그 대표적인 케이스다.
최근 윤아의 인스타그램에선 중국과 필리핀, 베트남 출신 네티즌들이 대거 몰려 자기들끼리 '설전'을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중국에서 돈 벌고 싶으면 빨리 남중국해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는 중국인들과 "윤아는 한국 사람이다. 왜 중국을 지지하는 글을 올리냐"는 필리핀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뒤엉켜, 평온하던 윤아의 SNS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만 것.
이처럼 '친중 발언'을 강요하는 중국 네티즌의 무례한 요구에 대해 윤아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아직까지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
◆ '차이나 드림' 꿈꾸는 '친중파 한류스타' 득실
중국이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이래 주변국들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가고 있다. 특히 중국과의 교역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는 우리나라는 경제·사회 각 분야에 걸쳐 중국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지나칠 정도로 높아져 있는 상황이다.
'문화·연예 산업'도 중국의 입김이 세지고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초창기 우리나라의 콘텐츠 수출 대상국에 지나지 않던 중국은 이젠 '최대 투자국'이자 '거대 소비시장'으로 급성장,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렸다.
드라마, 영화, 예능프로그램 등 영상콘텐츠 상당수가 중국 자본을 받아 제작되고 있으며 수많은 연예인들이 중국 현지 시장에서 활동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진지 오래.
헐리웃 진출을 동경하던 연예인들이 하나둘 '차이나 드림'을 꿈꾸는 친중파로 변해가는 모습은, 갈수록 거대해지고 있는 중국 엔터산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인기걸그룹 트와이스를 길러낸 JYP엔터테인먼트가 중국 여론에 쩔쩔매 굴욕적인 사과 영상을 게재한 것도 '문화 파워게임'에서 이미 우리나라가 중국에 밀리고 있음을 방증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단물만 쪽 빼먹고 중국 시장으로 돌아가 막대한 부를 누리는 이른바 '먹튀'들이 늘어가는 것도 부쩍 성장한 중국의 경제력과 무관치 않다.
슈퍼주니어의 한경을 비롯해 엑소의 크리스, 루한 등이 한국에서 얻은 인기를 발판 삼아 중국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대표적 '먹튀' 연예인들이다.
한국 시장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는 이들 '먹튀'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데뷔해 어느덧 한중 양국에서 '특급 대우'를 받게 된 중국 출신 스타들이 중국의 '영토 침략 야욕'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내뱉었다는 것은 이들이 한국을 자신들의 '핵심 거점'으로 삼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겐 모욕적으로 다가올, '남중국해 지도 사진'을 떡하니 자신들의 계정에 올려놓은 모습에선, 언젠간 돌아갈 모국이자, 경제적으로 이미 비교불가의 위치에 오른 중국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이행하겠다는 각오마저 엿보인다.
문화혁명 시기, 살기 위해 동료를 밀고하고 반공분자로 매도했던 60년대 문화 예술인들과, 오로지 비즈니스 차원에서 과잉 '충성 경쟁'을 하는 신세대 중화권 연예인들이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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